성차별은 존재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1,246회 작성일 22-02-21 16:30본문
ㄱ씨는 반복되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남편은 집안일에 소홀한 아내에게 화가 나 실수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이혼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가정보호 사건으로 분류하여 조건부 기소유예를 하라는 것이 당시의 지침이었다. ㄱ씨는 이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소유예 하면서 ㄱ씨의 생존을 빌었다. ㄴ씨는 교제하던 남성에게 맞다가 도망쳤다. 그는 ㄴ씨가 맞을 짓을 했다고 항변했다. ㄷ씨는 교제하던 남성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가 흉기로 20여차례 찔려 사망했다. ㄹ씨는 13세의 미성년자였다. 채팅앱에서 만난 30대 남성은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하며 성관계를 요구했고, 성관계를 할 때마다 용돈을 주었다. ㅁ씨는 지적장애인이었다. 그녀가 일하는 식당의 단골손님이었던 남성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성관계를 했다. 그는 지적장애인에게도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구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ㅂ씨는 결혼이주여성이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이혼 사유가 있어도 귀화를 위해 참아야 하는지 물었다. 고민하다 이혼 사유가 발생하면 입증을 위한 증거자료를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결혼이민 체류 자격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이혼의 귀책사유 없음을 입증하는 재판을 받아 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배우자를 상대로, 한국 법원에서, 한국말로 이루어지는 재판을 통해서. ㅅ씨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을 지원하여 피해영상을 신고하고 삭제하는 일을 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피해자들이 영상을 삭제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모두 쏟아붓는 것에 비해 사회는 불법촬영물을 단순한 ‘몰카’ ‘스캔들’ ‘야동’ 취급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분노의 대상에는 판사도 포함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냐는 그녀의 외침 앞에 할 말이 없었다.
‘폭력은 젠더로 설명되지 않는다, 폭력은 본능의 반문명적 표출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으나 동의하지 않는다. 폭력 자체는 인간의 본성일지 몰라도 실행될 때에는 상대적 약자를 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폭력의 인식, 예방, 규제의 정도에 따라 폭력 발생 빈도가 달라진다. 하나의 사건을 근거로 섣불리 일반화해선 안 되겠지만 폭력 발현에 일정한 경향성이 발견된다면 그때에는 폭력을 수월하게 하는 구조를 살펴야 한다.
성범죄를 반사회적인 일부 남성들의 예외적 성욕 발현이라고만 설명할 순 없다.
성평등과 건강한 섹슈얼리티 및 성범죄 예방을 교육하지 않고 성범죄를 가볍게 규제하며 피해자에 대한 낙인과 2차 가해를 묵인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의 안전이 구조적으로 확보될 수 없다. 남성의 폭력에 관대하고 부부·연인 관계에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당연시하는 사회에서는 가정폭력·교제폭력이 더 빈번히 발생한다. 가정의 유지를 위해 폭력 범죄 처벌을 피해자의 이혼 의사와 결부시키는 제도가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만나면 가정폭력은 범죄로 인식되기조차 어려워진다. 경제적으로 종속된 여성 피해자는 이혼을 쉽게 결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벌 가능성을 전제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가정의 재건을 돕기 위해 비형사적 개입을 하겠다는 제도의 취지와 달리 가정폭력이 실수 내지 부부싸움으로 가볍게 인식되어 방치될 수 있다. 미성년자가 자동차를 사고팔 수는 없지만 자신의 성은 팔 수 있다고 인식하는 사회, 미성년자의 성을 매매 형식으로 착취하려는 성인들이 차고 넘치는 사회에서 미성년자의 성은 제대로 보호될 수 없다. 지적장애를 성관계에 대한 사전 동의를 구하지 못한 핑계로 인정하는 한, 지적장애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 행사는 형해화된다. 결혼이주여성의 체류허가 요건으로 정상가족의 유지를 요구하게 되면 이주여성의 부부 관계 내 평등은 요원해진다. 사회가 디지털성범죄의 범죄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예방교육, 규제, 피해 회복을 소홀히 할 경우 여성의 정보 인권과 안전은 심각하게 악화된다.
어떤 폭력도 젠더만으론 설명되진 않는다. 아동, 장애, 국적 등 다양한 차별과 혐오가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젠더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폭력들이 있다. 젠더 기반 폭력들은 각각의 원인이 성차별적 구조를 통해 강화되면서 더 빈번히 발생한다. 그로 인해 위협받는 여성의 안전은 여성의 삶 전반을 취약하게 만들며 성차별의 결과를 낳는다. 이 악순환이 계속되는 한 성차별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