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부모 밑이니 이 모양이지” 가장 아팠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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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2,212회 작성일 22-02-25 13:48본문
시각장애인 김경미(46)씨는 지난달 18일 외출하면서 접이식 지팡이를 패딩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섯 살 아들 하준이의 손을 꼭 잡았다. 하준이는 집에서 5분 거리인 무인 슈퍼마켓까지 경미씨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점포에선 자기 키만한 냉동고에 매달려 원하는 아이스크림 위치를 엄마에게 알려줬다. 경미씨가 한두 차례 다른 제품을 집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들은 정확한 위치를 침착하게 설명했다. 돈을 내는 일도 둘이 힘을 합쳤다. 경미씨가 하준이를 들어 올리자 아이는 키오스크 화면을 터치한 뒤 신용카드를 꽂아 쇼핑을 마무리했다.
경미씨는 하준이가 클수록 자신이 편해진다고 말했다. “글자를 읽어주고, 낯선 곳에선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조곤조곤하게 설명하고, 제 손을 자기 얼굴에 댄 뒤 다른 사람 표정이 어떤지도 알려주니까요.” 하준이는 또래보다 빠르게 말문을 열었고 글도 일찍 깨우쳤다.
경미씨는 하준이가 있어 든든하지만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도 있다. 그는 “아들을 보면 ‘참 많이 컸구나, 잘한다’ 생각하다가도 다른 애들보다 너무 빨리 성숙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장애 부모 가정의 비장애인 자녀는 하준이처럼 유아기를 지나면서 부모를 돕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부담감과 책임감에 청소년기를 힘들게 보내는 경우도 있다. 취재팀이 만난 자녀들은 부모의 장애로 삶에 부담감이 있지만 주변의 편견과 차별 섞인 시선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중증 시각장애인 김경미씨가 지난달 18일 서울 자택에서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중 아들이 껴안자 미소짓고 있다.
최지영(가명·21)씨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수어 통역을 도맡았다. 다섯 식구 중 자신을 제외한 부모와 언니, 남동생이 모두 청각장애인이다. 부모는 통역이 필요할 때 화상통화를 요청했다. 학교 화장실에 들어가 전화를 받았고, 지영씨는 엄마의 해결사가 됐다.
통역 요청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엄마가 병원에 가던 날엔 학교에서 조퇴했다. 아빠가 이사할 집을 계약하던 날에도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갔다. 동생이 어느 날 새벽 두통을 호소했을 때 지영씨는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고 짜증 났어요. ‘왜 하필 나지’ ‘내가 엄마인가’란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죠.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게 너무 싫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청각장애인 4명과 함께 사는 집은 적막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답답함을 느꼈다. “가전제품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없어요. 도서관처럼 고요한 집이 숨 막히고 싫어서 PC방, 노래방에 있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가고 그랬죠.”
부모와 의사소통이 쉬운 것만도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수어로 깊은 속내까지 전달하긴 힘들었다. 부담감과 답답함은 비행으로 이어졌다. 폭력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는 일이 잦았다.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귀가 조처됐을 때 친구들은 떠나고 홀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가 경찰 연락을 받지 못하거나 받아도 소통이 안 됐기 때문이다.
딸에게 미안했던 엄마는 지영씨를 잘 혼내지 않았다. 이 또한 상처가 됐다. “엄마는 밖에서 제가 뭐 하고 다니는지 잘 물어보지도 않았고, 사고 칠 때만 관심을 줬어요. 그렇게라도 대화하고 싶어 자꾸 일탈했던 것 같아요.” 지영씨는 대학 진학 준비를 혼자 했다. “제가 갈 수 있는 대학의 등록금, 장학금 제도까지 다 알아보고 이야기하는데도 엄마는 ‘너 알아서 해’란 말만 반복했어요. 서러워서 엄청나게 크게 싸웠죠.”
지영씨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자퇴하고 현재 백화점에서 스포츠 의류 판매 일을 한다. 성인이 되고 삶이 안정된 뒤에야 엄마를 이해했고, 관계가 개선됐다. 엄마와 함께 의류사업 구상을 하고 노래 ‘엄마가 딸에게’ 수어 영상을 공유할 정도다. 얼마 전에는 엄마의 인공와우(달팽이관 기능을 대신하는 장치) 수술을 의욕적으로 알아봤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도 사이가 엄청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 자녀로서 가장 힘들었던 점을 ‘주변 어른의 고정관념’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청각장애니까 네가 잘해야 한다”며 지영씨가 말을 하기 전부터 수어를 가르쳤다. 학교에선 “하여간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 이 모양이지”라고 말하는 교사가 있었다. 다른 어른들도 ‘네가 가장 노릇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도 그런 말을 들으면 한숨부터 나와요. 부담도 되고…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왜 간섭이지 하고 짜증이 확 나요.”
가장 힘들었던 건 사회의 시선
장애 부모를 둔 자녀가 느끼는 부담감은 가정마다 다르다. 장애 정도와 부모의 직업 여부, 소득 규모 등이 변수가 된다. 부모가 안정적인 소득이 있고 장애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면서 신경을 많이 쓸수록 자녀의 부담감이 줄어든다. 부모가 모두 시각장애인인 송민규(23)씨는 “청소년기 부모님의 장애로 힘든 건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시각장애 체험을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의 대표이고 어머니는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로 일한다. 민규씨는 고교에서 IT 공부를 하고 졸업한 뒤 상근예비역으로 복무 중이다. 민규씨는 “갈등이 있었다면 엄마의 간섭으로 인한 것이었지 엄마, 아빠의 장애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민규씨를 가끔 화나게 하는 건 부모를 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아버지가 길에서 어떤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는데 그 사람이 아버지를 보더니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정말 폭발하는 줄 알았죠.” 민규씨 동생인 민욱(17)군도 “제가 안 좋게 생활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보시면 우리 부모님은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책임감은 있을 수밖에 없다. 곧 20대 중반이 되는 민규씨는 부모에게서 독립을 생각해봤지만 관두기로 했다. “집안에서도 제가 도와드릴 상황이 많아요. 엄마가 컴퓨터를 못 만지시니까 발표자료를 만드는 걸 도와드려야 해요. 제가 나가도 가족이 잘 살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결국 독립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부모가 장애 앞에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도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 서유나(14)양은 엄마가 중증 시각장애인이고 아빠가 지체장애인이다. 엄마 박은경(45)씨는 “유나가 어렸을 때부터 장애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학교 행사에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학교에서 어려운 일은 없는지 매일 묻고 소통하려 했다. 아빠(53)도 초등학교 때 문제집을 같이 풀어주는 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유나는 집안에서 손이 불편한 아빠를 위해 여러 심부름을 해야 한다. ‘귀찮은 일’이지만 큰 부담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아껴주는 엄마, 아빠가 좋다. “초등학교 때는 창피했는데 커 가면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엄마, 아빠가 지금처럼 저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요.” 다른 한편으론 책임감도 있다. “엇나가지 않고 모범적으로 커서 돈을 많이 벌어 엄마, 아빠에게 잘해줘야지 이런 마음도 있어요.”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건 ‘돌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가정이다. 청소년기 자녀가 장애 부모와 살아가면서 과도한 부담감을 떠안는 경우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은 “돌봄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면 청소년기 학업이나 교우관계에 시간을 덜 쓰게 될 가능성이 많다”며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에 대한 실태 파악이 국내에선 전혀 되고 있지 않아 어떤 정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다음 달 영 케어러에 대한 지원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첫 실태조사에 나선다. 전문가들은 상황이 열악한 장애인 부모의 자녀는 정책 수립 시 특별한 취급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장애 부모의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영 케어러가 될 가능성이 있고 장기간 돌봄 역할을 요구받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회의 특별한 관리와 지속적·체계적 사례 관리·지원이 필요하다”며 “온전한 양육을 지원받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할 때 심리 정서적 지원, 학업진로 지원, 부모 돌봄 행위에 대한 현금 지원 등을 포함한 정책 수립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복지 선진국은 이미 지원책을 시행하고 있다. 국회도서관이 발행한 ‘영 케어러 지원-영국, 호주의 사례’에 따르면 호주는 2015년부터 ‘영 케어러 학비보조금 프로그램(Young Carer Bursary Program)’을 운영하고 있다. 2021년 기준 연간 3000달러(약 255만원)를 4차례 분할 지급한다. 호주 정부는 지원 필요성이 가장 절실한 영 케어러를 가려내기 위해 가중치 기준을 활용하는데, 장애 가족을 돌보는 경우 가장 높은 가중치가 부여된다. 호주 정부는 지원책 도입 후 보조금을 받은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개선되고 돌봄·재정적 측면에서 부담을 더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2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