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도맡은 가족 생활고·우울증… 벼랑 끝 선 발달장애 자녀 부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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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1,479회 작성일 22-05-03 11:19본문
“많은 노력에도 이런 결과를 막지 못했고, 계속 재발된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 개인을 비난하면서도 중벌에 처할 수 없는 이유는 결과에 상응한 적정한 형벌과 실제 선고되는 형벌 사이의 차이만큼이 바로 국가와 사회의 잘못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선고되지 않은 나머지 형이 우리가 받아야 할 비난의 몫이다.”
2020년 5월 발달장애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을 시도한 40대 여성 A씨에게 울산지법 형사11부 박주영 부장판사가 징역 4년을 선고하며 읽은 판결문의 일부다. 박 부장판사는 32쪽에 달하는 판결문에서 사회적 책임에 대해 비중 있게 지적하면서 “이 참혹한 기록을 상세하게 부기하는 이유는, 우물가에 서 있는 또 다른 ‘B’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면 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반짝 주목받곤 하지만, 사회적 무관심과 열악한 현실에 지쳐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도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딸을 살해한 뒤 자신도 뒤를 따르려다가 실패한 50대 어머니가 법정에 섰다. 검찰은 그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1일 법원 판결문 열람 결과,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전국에서 발달장애(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포괄) 자녀 살인 혹은 살인미수 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건만 최소 8건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부모가 극단적 시도에 ‘실패’한 경우에만 재판을 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그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달장애인 자녀 살인 및 살인미수의 경우 여타 강력범죄에 비해 형량이 다소 가벼운 편이다. 8건 중 살인죄로 기소된 4건은 최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최대 징역 4년이 선고됐다. 살인미수죄 4건도 최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최대 징역 1년6개월이 내려졌다. 8건 중 5건(62.5%)은 감형 이유로 ‘발달장애 자녀 돌봄 부담감’을 고려했다. 재판부도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A씨의 형량인 징역 4년도 재판부가 그 점을 충분히 참작한 결과다. A씨의 딸 B양의 나이는 초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9세지만, 발달장애로 정신적 나이는 3세에 불과했다. B양은 외출 후 귀가하면 얼굴이나 팔 등 신체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딸을 언어치료센터, 특수학교, 병원 등에 보내 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우울감이 커져 가던 상황에서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 남편마저 그 충격으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병원에 입원하고 무급휴직에 들어가게 되면서 A씨의 심리적·경제적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 딸의 치료비와 생활비로 A씨 부부에겐 1억8600만원의 채무가 쌓였다. 양육과 생계 부담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A씨는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이와 함께 편히 쉬고 싶다”며 B양에게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등을 먹였다. 이어 자신도 40일분의 약을 삼켰다. A씨는 재판 당시 “내가 죽으면 딸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딸을 살해하고, 나도 목숨을 끊으려 했다”고 증언했다.
부모가 발달장애 자녀를 살해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발달장애인 지원서비스와 정책 부족이 지적되곤 한다. 발달장애인 가족이 돌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부모는 자신이 떠난 세상에서 자녀가 홀로 살아가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부모연대)는 지난달 19∼20일 대규모 삭발식을 진행하며 “반복되는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죽음을 멈추기 위해서는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삭발식 당시 백주현 부모연대 원주시지회장은 “아들은 이미 성인이 됐고, 저는 흰머리가 대부분인 할머니가 돼 가고 있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아들이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가 없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윤종술 부모연대 대표는 “발달장애인 돌봄이 그 부모와 가족에게만 오롯이 맡겨진 상황에서 그들은 10년, 20년이 지나도 자녀와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면서 “낮 시간 발달장애인의 활동을 지원하는 주간활동서비스 확대와 밤 시간엔 지원주택에서 주거유지서비스를 보장받을 수 있는 24시간 지원체계가 갖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