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발달장애인 사망 또 있었다... "고양이는 살았는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2,018회 작성일 22-08-12 14:42본문
빈 깡통으로 가득찬 비닐 포대는 반지하 출입문보다 높이 쌓여있었다. 2미터 높이 벽을 가득 메웠던 수십 개의 폐품 포대들은 빗물에 무너져내려 반지하 집 문 앞을 다 덮었다. 침수된 집에서 흘러 넘친 어르신용 유모차와 쌀통, 식기, 빨래 건조대가 깡통 포대들과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주택. 이 주택 반지하에 살던 50대 여성 A씨는 폭우가 내린 지난 8일 밤 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익사했다. 집에 함께 있던 노모 B씨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A씨는 키우던 고양이를 구조하려다 미처 나오지 못해 숨졌다.
이웃들에 따르면 평소 A씨의 어머니 B씨는 이른 새벽 동네를 돌아다니며 빈 깡통을 모아 고물상에 팔았다고 한다. A씨네 집 앞 깡통 포대 더미들은 늘상 바깥에서 보일 정도로 높이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소방관계자는 "현관 앞 더미로 인해 당시 구조 진입이 어려웠다"고 했다.
이 주택 반지하에는 총 두 집이 있었고 네 명이 살고 있었다. 모두 A씨 가족이었다. 한 집에는 A씨와 어머니 B씨, 그 옆집에는 A씨의 여동생 C씨와 10대 아들이 함께 살았다. A씨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이웃들은 A씨가 발달 장애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A씨 가족은 모두 세입자였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이 주택 반지하 시세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 선이다.
그날 밤 A씨와 어머니 B씨는 집 안에, 동생 C씨와 그의 아들은 집 밖에 있었다. 어머니는 나왔지만 언니가 보이지 않자 동생 C씨가 밤 8시 27분께 경찰에 신고 접수를 했다. 구급대는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에야 도착했다. A씨는 밤 10시 ~ 10시 30분 사이에 구조됐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채였다. 나머지 가족들은 집 앞에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A씨네 바로 앞 주택 반지하에 사는 양아무개(43)씨는 "내 키가 170센티인데 당일 10시쯤엔 집에 물이 얼굴 높이까지 찼다. 아마 A씨 집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주변 주민들은 "장애가 있긴 했지만 열번을 만나면 열번을 인사할 정도로 상냥했고, 키우는 개와 고양이는 물론 비둘기까지 밥을 줄 정도로 착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이날 오후께, A씨네 집 앞으로 돌아온 고양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웃 이아무개(73)씨는 "고양이들은 살았구만…"이라며 글썽였다.
집 앞 가득찼던 깡통 더미들… 주변 반지하 이웃들도 위급했던 그날 밤
8일 밤 폭우로 위험했던 건 A씨네 반지하 뿐만이 아니었다. 인명 피해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A씨가 살던 주택 바로 옆 주택, 앞 주택, 대각선 주택에 있는 반지하 집들 모두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졌다. 이들 4개 주택 모두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고, 지상 2층과 옥탑, 반지하 1층 구조로 돼있는 것도 똑같았다. 반지하 거주자들은 모두 세입자였다. 이웃들은 특히 이 일대엔 고령 주민이 많아 더 아찔한 상황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A씨네 주택의 옆 주택 반지하에는 집은 두 개였지만 한 집은 얼마 전 이사를 나가 비어있었다. 나머지 한 집에는 90대 노부부 산다. 지팡이 없이는 거동이 불편한 김(90)씨와 이(87)씨 부부는 8일 밤 8시 넘어 집에 물이 갑자기 불어나는 걸 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수압 때문에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다. 창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들은 주인 부부(87, 75세)가 바깥에서 함께 현관문을 열어봤지만 이미 가슴팍까지 차오른 물 탓에 소용 없었다.
이때 다행히 옥탑방에 살던 50대 중국인 남성이 급히 내려와 반지하 창문에 있는 쇠창살을 온 몸으로 뜯어냈다. 창문이 열렸고 안에 있던 부부는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87)씨는 "남편도 나도 몸이 불편해 중국인 이웃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나오자 마자 물이 집안으로 확 빨려 들어가더라.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 했다"고 했다. 이씨는 "반지하는 얘기만 들어봤고 살아보긴 이번이 처음인데, 이렇게 홍수가 나면 너무 무서워 살 곳이 못 되는 것 같다"라며 "옆집도 반지하 사람만 죽었지 않냐"고 울먹였다.
A씨네 주택 대각선 방향에 있는 주택의 반지하에도 두 집이 있는데, 한 집엔 여성 조(67)씨가 홀로 살고 있었고 옆집엔 남성 임(50)씨가 홀로 살고 있었다. 임씨는 밤에 일을 하고 퇴근이 늦어 그날 밤에도 침수 상황을 겪지 않았다. 반면 조씨는 밤 8시께까지 TV 연속극을 보다가 집에 점점 물이 들어차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이미 현관문은 열리지 않는 상태였다. 조씨는 집안에서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은 화장실로 피신했다. 화장실 변기 옆에 반지하 창문이 있었지만 방범창이 가로막고 있었다. 힘으로 흔들어봐도 부수고 나가긴 역부족이었다.
기독교도인 조씨는 예수님을 외치며 창문에 대고 살려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집주인 정(83)씨와 이(73)씨 부부가 방범창을 뜯어내려 했지만 역시 힘에 부쳤다. 남성인 정씨가 방범창에 대고 톱질까지 했다. 하지만그마저 실패했다. 그러던 중 현관문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사이로 물이 드나들면서 문이 열렸다. 그 덕에 조씨가 탈출할 수 있었다. 조씨는 "만약 현관문에 유리 부분이 없고 쇠로만 돼있었다면 죽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었다.
양씨는 곧바로 옆집 할머니 문을 두드렸고, 양씨의 도움으로 할머니도 무사할 수 있었다.
"반지하, 사람 살 곳 못 돼"… 신림동·상도동 폭우 사망 사고의 공통점
같은 날(8일) 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도 반지하에 살던 40대 여성과 그 초등학생 딸, 발달장애를 가진 언니까지 3명의 일가족이 한꺼번에 익사해 애도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상도동 A씨의 사망 소식은 9일 오후 뒤늦게 알려졌다.
상도동 반지하와 신림동 반지하 사고 현장은 공통점이 여럿이었다. ▲ 일단 물은 8일 밤 8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급격히 불어났다. 그 시각 서울엔 시간당 130미리의 기록적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반지하 주민들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갑자기 수위가 높아졌다. 위기감을 느끼고 현관문을 열려 했을 때, 이미 늦은 경우도 있었다.
▲ 현관문이 열리지 않으면 주민들은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반지하라 모두 쇠창살 등으로 막힌 방범창이 설치돼있었다. 보안상 이유 때문이다. 특히 노인이나 여성 주민들은 방범창을 더더욱 필수로 여겼다. 하지만 이번 폭우엔 응급 대처에 족쇄가 됐다.
▲ 또 상도동·신림동 주민들은 공히 경찰·소방 당국의 대응을 아쉬워했다. 상도동 주민 김(75)씨는 "사고 당시에도 가족이 여러 번 신고를 시도했지만 전화 연결이 쉽지 않았다"라며 "출동차량이 없어서 다른 곳에서 가고 있다고 하던데, 심각한 곳부터 먼저 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실제 경찰·소방 측에 확인한 결과 8일 밤 상도동 반지하 집에 출동한 구급대는 관할인 동작소방서 소속이 아니라 관악소방서 소속이었다. 소방 관계자는 통화에서 "빗속에 도로는 마비된 상태였고 동원할 수 있는 차량에도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 주변 노후 맨홀에서 하수가 역류하면서 물이 갑자기 많아졌고, 급격하게 반지하 쪽으로 흘러 내려갔다는 증언도 상도동과 신림동 모두에서 나왔다. 상도동 사망자 A씨의 이웃 오아무개(50)씨는 "하수구나 배수관이 오래될수록 자주 뚫어주고 청소를 해줘야 물 난리 때 사고가 안 나는데, 최근에 동네 주변 맨홀 관리가 소홀했던 것 같다"고 했다. 상도동 A씨 주택 앞 좁은 골목에만 두 개의 맨홀이 있었다. 복수의 주민들은 "맨홀에서 물이 심하게 올라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