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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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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386회 작성일 23-02-0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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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리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

- 허균, 《순암집》 순암선생문집 제17권 / 잡저(雜著) 천학문답(天學問答) #
가족이 일부일처라는 권위주의 가정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성혁명을 구현하며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처방전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집' 안에서의 성해방입니다.[1]

- 테라야마 슈지, 「사자에상의 성생활」, 영화예술 1970년 11월호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나 성적 쾌락 추구의 자유가 보장될수록 민주적 사회 분위기와 개개인의 인권 역시 차츰 보장돼 간 것이 문화적 선진국들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마광수, 「에로스를 옹호함」, 2011[2]

1. 개요[편집]

Sexual Liberation

성에 관한 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적 사상 및 운동들.

그 자체로는 문화적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문화적 해방운동'에 해당하며, 좀 더 넓은 맥락에서의 정치적 성향에선 일반적으로는 자유주의로부터 급진사회주의와 아나키즘까지, 대체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향과 친화적이지만,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공명하는 편이다.

성해방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주류 규범의 성적 억압이나 종교적 권위로부터 저항하여 인간의 성적 본능을 존중하며 성개방을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한다. 문화적 해방주의(cultural liberation)의 한 갈래로 여겨진다. 주의해야 할 점은 맑시즘이나 라캉철학처럼 어떠한 특정한 단일 사상을 일컫는 용어가 아니라, 성해방에 관한 일련의 유사한 이념들을 한 데 묶기 위해 쓰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성(Sexuality)에 관한 입장차를 정리하기 위해 편의상 만들어진 개념이다.[3] 성해방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사상은 흔히 성적 보수주의(Sexual Conservatism)라고 일컬어지곤 한다. 성해방주의를 쾌락주의로 오해하고 반대 편에 금욕주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쾌락주의자로 볼 수 없는 성해방주의자들도 존재한다.[4]

성해방적 관점은 성적 자유주의(sexual liberalism)라고 칭해지기도 하며,[5] 1960년대에 68혁명으로 인한 시작되어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진 성해방적 사회 운동이나 조류는 성혁명(Sexual revolution)이라고 불린다.

2. 설명[편집]

대체로 검열권력을 부정하는 등 파쇼나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경향이 강하며, 문화적 해방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우파 해방주의가 아니라 좌파 해방주의로 취급된다.[6] 성[7]에 대한 억압을 위계 질서로 보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기존의 성적 고정관념과 관습을 탈피할 것을 주장한다. 보통 "성은 정치적이다"라는 구호를 케이트 밀레트를 위시한 급진 페미니스트의 전유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성 정치의 개념은 빌헬름 라이히가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알프레드 킨제이오쇼 라즈니쉬[8], 다니엘 게랭[9]휴 헤프너[10]테라야마 슈지[11]마광수[12]허균 등이 대표적인 성해방주의자이며,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니나 하틀리[13], 등 성 긍정 페미니즘(Sex-positive feminism)이 존재한다. 흔히 성 긍정 페미니즘을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래디컬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성 긍정 페미니스트인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학자가 퀴어 이론에 공헌한 게일 루빈. 물론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중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근거로 성해방(피임과 낙태를 결정할 권리)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또한 성적 자기대상화가 오히려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립스틱 페미니즘도 존재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마르크스의 급진적인 사상을 접목해 성 해방과 성 정치를 주장했으며,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성을 혐오한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모두 비판했다. 라이히의 이론은 68세대 신좌파[14]에 계승되어 서구 사회가 성적으로 개방되고 진보적인 사회가 되는데 크게 일조했다. 나아가 이러한 성해방 움직임은 퀴어이론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반면, 공산권이나 제3세계에는 성해방주의의 물결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공산권이었던 세르비아의 영화감독 두산 마카베예프(Dušan Makavejev)는 라이히의 성해방론에 입각해서 『WR: 유기체의 신비』(1971), 『스위트 무비』(1974)와 같은 걸작 영화들을 쏟아냈다. 마카베예프는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성적 억압을 비판하면서도 자본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영화적으로 드러냈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는 구 동독의 1960년대 이후 사회적 흐름에 대한 재평가등을 통해 서구에 비해 덜 주목을 끌어서 그렇지, 일상생활 영역에선 서구에 비해서도 더 관용적, 개방적인 면도 적잖았다는 평가도 있다.[15] 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있다.Do Communists Have Better Sex?[16]

일본에서는 성해방주의의 영향을 받아 70~80년대 포르노 해방 움직임에 동참했으나, 성에 긍정적인 사회 분위기를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하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개방적인 컨텐츠가 공존하는 기형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한편, 한국의 박정희 군부 정권은 성해방주의의 흐름을 '서구의 퇴폐 사상'으로 취급하면서 통제하려고 했다. 80년대 3S 정책으로 일부 개방되긴 했지만 이것이 성해방으로 나가지는 못하였고 제한적으로 그쳤을 뿐이다.

성해방의 흐름은 68세대의 분열과 68혁명의 퇴조, 히피운동의 몰락 안티 포르노 운동의 대두, 80년대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등장 등으로 단절됐다. 안티 포르노 운동가들은 성해방주의를 '남성만의 성해방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성해방주의가 결과적으로 남성들의 시선에만 움직이는 여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성해방주의 측에서는 성인 컨텐츠의 시선이 남성 편향적인 것은 "남성중심사회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아니라 남성중심사회로 인해 영향받은 결과물"이라는 근거로 반박한다. 즉, 성인물이 남성 편향적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해결방법에 있어서 성문화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성문화를 확산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 잠시 성 해방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크게 주목받은 인물이 마광수였으나,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마광수는 주류 문학계와 교수 사회의 타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줄곧 내놓아 이미 원로 교수들 사이에서 찍혀 있는 인물이었으며, 교수 출신이었던 현승종 당시 국무총리가 직접 지시하고 수사를 지휘하여 마광수가 강연 도중 현장에서 체포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로 마광수는 교수 사회에서 대놓고 따돌림을 받는 처지에 놓였으며, 현재까지 그저 변태나 마초이스트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17] 결국 이러한 사회적 차별과 혐오 시선은 고인의 운명을 달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마광수 항목 참조.

현재 한국에서 성해방주의의 움직임은 상당히 미약한 상태. 표창원이 포르노 합법화 얘기를 꺼냈다가 보수 기독교 단체들과 여성단체들로부터 곤욕을 치룬 걸 보면, 성해방주의가 공론화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현재 한국에서는 안티포르노 페미니즘이 대세가 된 상황이다. 그러한 표창원 조차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시절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이 들어간 여폭법에 앞장서는 등 페미니즘 옹호 성향을 많이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성해방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성적 억압에 대한 불만이 크며 이것이 문제임을 주장하면서 성해방을 이루려고 노력하는터라 계속해서 문제임을 주장하며 노력하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 성해방도 이루어질것으로 본다.[18] 

3.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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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0세기 이전[편집]

서양의 성해방주의자들은 성적 보수주의가 유행하게 된 계기를 성욕을 금기시하는 아브라함 계통 종교가 대중화되면서 일어난 일이고 고대엔 오히려 성적으로 개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동아시아는 유교가 대중화되면서 성적 보수주의가 유행하게 되었다.[19]

대표적으로 고대 인도는 카마수트라를 저술하고 성적인 유적을 남겼을 정도로 성해방주의가 있었으며[20]미노아 문명도 여성들이 유방을 노출하고 성적인 축제를 열었을 정도이다.[21]
또한 에트루리아 문화의 성적인 개방성에 대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역사가들의 여러 기록도 전해오기도 한다.

그리고 11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유럽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데콜타주가 있지만 당시 유방은 관능적인 의미로보단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는 의미로 작용하기 때문에 성적 개방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22]

3.2. 20세기 초반[편집]

성해방주의자들은 20세기 이전까지 세계의 주류였던 성적 억압에 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 것은 러시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에 따라 서구에서 유래가 없었던 일명 “성담론”이 오고 갔다. 그러나 성해방주의자들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집권 이후로 이런 시도를 모두 무산시켰고 과거의 성적 보수주의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한편 독일에서는 빌헬름 라이히가 나치즘와 스탈린주의보수주의에 반대하여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이론을 결합하여 성해방주의 이론을 설파했다. 비록 탄압당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이후 68혁명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68혁명에 영향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킨제이가 있다. 물론 두 사람은 성적 자유주의를 추구하지 않았지만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욕은 사회악이라는 당시 기독교적 규범에 반한 이론을 전개했으며 킨제이는 킨제이 보고서를 통해 여성에게도 성욕이 존재하고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3.3. 현대의 성해방주의[23][편집]

현대적 의미에서의 성해방주의(Sexual Liberalism)는 1920년대에 이미 그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급속한 도시화, 대중 언론의 확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흑인 시민권 운동,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24], 반전 운동, 사회적 정의 운동, 게이 인권 운동과 같은 사회 운동이 성해방 사회(sexual liberal society)가 도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미 연방 대법원은 One v. Package(1935), Griswold v. Connecticut(1965), Loving v. Virginia(1967), Roe v. Wade(1973) 등의 판례를 통해 성해방주의를 저해하던 법적 메커니즘을 약화시켰다. 물론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없진 않았다. 도덕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 국가주의적 수사여구(nationalized rhetoric)를 정당화시켰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미국의 주류 문화에서는 대체로 "결혼이나 출산과는 관계 없는 성적 표현"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성해방주의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사회적.정치적 백래쉬(backlash)가 두드러진 것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였다. 1980년대 무렵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이 정권을 쥐었고, 성해방주의는 정치.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아 위축되게 되었다. 20세기 말, 기독교 근본주의가 성 해방, LGBT 인권,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항하여 벌인 새로운 보수주의적 움직임을 성해방주의자들은 '문화 전쟁'(culture wars)'이라고 부른다.#문화전쟁에 관한 참조 링크
  • 1970년대
68혁명은 마르크스주의 세력에 의해 보수주의파시즘현실사회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시 성자유주의자들은 피임낙태야동성매매혼전성교, 비삽입성교, 더 나아가 동성결혼의 합법화 및 동성부부에 대한 국가의 사법적 보호, 난교 등 기존에 이상성욕이라 여겨지던 성적 행위들을 옹호했으며 이에 따라 질병이나 죄악으로 여겨졌던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이 인정받게 되었다. 당시 페미니스트들도 성해방 곧 여성 해방이라고 주장했으며 피임, 낙태의 자유화를 주장했고 심지어 인공 자궁을 옹호했다. 그리고 남성 위주의 야동에 반대하여 여성용 야동도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플레이보이와 허슬러라는 도색 기업도 성해방주의를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들은 당시 기독교 우파, 또는 여성의 성적대상화를 반대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과 싸우곤 했다.[25]
  •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와 마가렛 대처 등의 신우파안티페미니즘 정권이 집권하면서 성해방주의가 약화되었다. 포르노, 성매매, LGBT를 탄압했다. 그리고 1980년대로 넘어오며 페미니스트 진영에서도 래디컬 계열 페미니스트 특히 그 중에서도 반 포르노 성향인 페미니스트[26]들을 주축으로 한 포르노그라피 반대 운동 등을 필두로[27] 1960-70년대에 부상한 성해방, 성혁명 흐름과 그 유산에 대해 사실상 반기를 드는 입장(백래쉬?!)[28]으로 선회하는 움직임이 득세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실제로는 페미니즘 진영, 특히 안티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1960-70년대 기간에도 성해방주의에 대해 비토에 가까운, 불편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신좌파 운동의 전성기이자 한편에서는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다른 한편에선 히피 무브먼트와 반문화 Counter Culture가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이미 성해방/성혁명의 흐름을 불편하게 여기던 그들의 주장은 그냥 묻혀 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1960-70년대의 시점에선 특히 당시 젊은 세대의 남성들 뿐 아니라 여성들도 다수가 성에 대해 침묵과 금기로 일관되어 온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에 환영하던 상황이며,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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