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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출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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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20회 작성일 23-02-1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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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출산율(出産率, Total Fertility Rate)에 대한 문서.

2. 시대별 구분[편집]

2.1. 들어가기에 앞서[편집]

이 항목에서는 대한민국의 출산율과 출생아 수에 관한 통계를 다룬다.

대한민국의 출생아 수와 출산율, 모의 첫 출산 연령 등 출산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1970년 통계청의 인구동향 조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전의 통계는 행정 관청에 접수된 출생 신고자의 수, 총인구의 변동 추이, 각 개별 호의 호적 변동 내용, 초등학교 입학자 수 등 정확도가 떨어지는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1970년 이후의 출산 관련 통계표는 통계청에서 집계 및 작성한 인구동향 조사에 기반해 작성한다.

2.2. 20세기 초~광복(대한제국~일제강점기)[편집]

자료1

조선총독부 등에서 집계한 인구 자료에서 오늘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루고 있는 옛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한반도 북부 지역의 자료를 제외하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는 한반도 중부와 남부 지역을 대상으로 인구 통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확한 출산율 및 출생아 수 통계는 없지만 15% 내외일 것으로 추정되는 영유아 사망률과 평균적으로 15% 내외의 수치를 보이던 인구 증가율로 미뤄보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는 대체로 약 6.0 전후의 정도의 가임기 여성 출산율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과 대만 그리고 중국의 출생아 수가 감소하였던 것처럼, 한국도 1930년대 말을 기점으로 그 이전까지 15~20% 사이를 기록하던 인구 증가세가 10% 내외로까지 꺾였다. 이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제국이 전기 경제 상태로 빠져들며 평균적인 소득 수준과 식랑 사정이 악화되어 출산이 줄어듦과 동시에 징병/징용 등 일본제국의 인력 동원으로 발생한 인구 유출 및 청년 인구의 공백으로 말미암은 출생아 수 감소가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추정 연간 출생아 수는 대략 190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증가하여 1935~36년경 65만 명으로 최대 수치를 찍은 이후 감소하여 1943~44년 무렵에는 50만 명대 초까지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2.3. 광복~1950년대[편집]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연합군에 항복하며 8.15 광복이 이뤄진 이후 전시 경제, 청년 인력 공백 등의 악재들이 일시에 해소되며 1945~1946년부터 출생아 수 증가가 시작됐다. 1947~49년 사이에는 미뤄왔던 출산이 악재의 해소로 본격적으로 이뤄지며 연간 출생아 수가 60만 명대 후반으로 크게 증가했다. 인구의 자연증가율도 17% 내외를 기록하며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수준을 회복했다.

자료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되머 1950~51년 연간 출생아 수는 60만 명대 초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1951년 여름 오늘날의 휴전선 부근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자 출생아 수 회복이 시작됐다. 이후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이 사실상 끝나고 청년들이 복귀하자 전후 베이비붐 현상이 발생하며 1960년까지 급격한 출생아 수 증가를 겪었다. 이 시기 가임기 여성 출산율은 연간 평균 6.0 이상을 기록했고, 출생아 수도 급격히 늘어 1960년에는 108만 명으로 역사상 최고점을 기록하였다. 1960년을 기준으로 여전히 1000명당 95.7명이라는 높은 추정 수치를 보이고는 있으나, 이 시기 의료 기술 및 의료 인프라 접근성이 개선되어 이전 시대에 비해 영아 사망률이 크게 줄어들며 인구 증가세를 가속화 했다. 때문에 서울대학교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이 시기 태어난 이들은 평균 5.2명의 형제를 두고 있을 정도로 가정에 아이가 많았다.

2.4. 1960년대[편집]

추정 출생아 수와 인구 자연증가율 모두 1960년 정점을 찍은 이후 1960년대 초에 접어들며 하락하였는데, 이는 가족계획 정책의 시행과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으로 말미암은 출산율 감소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산아제한 정책을 잘 나타내는 표어로 1963년에 나온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가 있으며, 1966년부터는 "세 자녀 갖기 운동", "3.3.35 원칙"[1]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추정 가임기 여성 출산율은 1960년 6.16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4.5 내외까지 줄어들었다.

다만 가임기 여성 출산율 자체는 떨어졌지만 이전 세대에 비해 인구가 많았던 1930년대 중반~1940년대생이 혼인 및 출산 적령기를 맞이하여 가임기 인구 수가 크게 늘었다. 때문에 출생아 수는 99만 명을 기록한 1965년을 제외하면 1960년대 내내 100만 명대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 태어난 이들의 인구는 2020년 5월 기준 총 8,668,601명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출생아가 태어난 기간인 만큼 2020년대 초를 기준으로 이들이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를 이루고 있다.[2] 그리고 이 세대를 "'8'0년대 대학 학번, '6'0년대생"이라는 의미에서 86세대라고 한다.

2.5. 1970년대[편집]

1970년 통계청의 인구동향 조사가 시작되며 출산과 관련한 정확하고 공신력 있는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1971년까지는 출산율 4.5 내외와 100만 명대 출생아 수를 유지했으며 1974년까지는 출산율 4.0 내외와 출생아 수 90만 명 이상을 유지했으나, 1970년대 중후반 들어 산아제한 정책이 오일쇼크와 겹쳐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면서 출산율이 2명대로 빠른 속도로 진입했다. 이 시기에 출생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형제수가 4~5명에서 2~3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출생아 수도 80만 명 내외까지 줄어들었다. 물론 그 이전의 출산율이 높다 보니 형제 수가 많은 경우도 제법 있었기는 했다.

2.6. 1980년대[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러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 베이비붐 세대의 가임기가 되어 출생아 수가 계속 80만 중후반대를 넘어서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 초만원이라는 캠페인으로 대변되는 산아제한 정책이 대폭 강화[3]되었다. 그러나 1983년, 출생아 수 80만 명대가 붕괴되었고, 1984년부터 출생아 수가 60만 명대로 줄고, 출산율이 1명대로 진입하였고, 1990년 인구 증가율이 0.99%로 1% 아래로 떨어졌다.

2.7. 1990년대[편집]

1990년대 들어 산아제한정책이 이전보다 다소 완화되어서 둘째 혹은 셋째를 가지는 가정이 잠시 늘어났으며 인구증가율도 다시 1%를 넘어서기도 하였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빨이 떨어졌고 IMF 외환위기와 취업연령의 상승 등으로 출산율이 조금씩 감소하기는 했으나 이때까지는 그래도 출산율 1.4명 이상과 출생아 수 60만 명대 초반대 이상을 유지했다. 출산율 1.3명 미만의 초저출산 사회로 진입한 것은 2002년 이후이므로 그래도 아직 본격적인 저출산까지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1991년~1997년생의 인구수는 1984년~1990년생보다도 많다.

과거에도 불임, 난임 부부가 있었지만 쉬쉬하거나 자녀가 없는 것을 두고 색안경을 끼고 쳐다보는 주변의 편견에 스스로 침묵했지만, 1990년대 이후 권위주의가 점차 사라지고, 컴퓨터PC의 등장으로 인한 개인주의가 등장하면서 일부 기혼자들은 불임, 난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나 공개하는 일이 급증하였다. 각종 환경 오염과 환경호르몬, 사회 진출 연령대의 상승, 만혼 현상 증가, 이혼율 증가 등으로 자연스럽게 저출산이 심화되었다. 과거와는 달리 불임, 난임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었고, 개인주의 문화가 증가하면서 불임, 난임에 대한 편견도 자연스럽게, 저절로 희석되어 사라졌다.

2.8. 2000년대[편집]

2000년에는 밀레니엄 베이비라고 해서 출산율이 소폭 늘었으나 (1.48명 / 64만 명), 이듬해인 2001년에는 신생아수 60만 명선이 붕괴되었고, 2002년에는 50만 명선도 붕괴되면서 2002년부터는 초저출산 기준 출산율 1.3 미만을 기록해 대한민국에서 저출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5년에는 출산율이 1.09를 기록했다. 다만 2006년 1.13으로의 재증가를 거쳐 황금돼지해[4]라는 속설이 퍼지던 2007년 출산 붐으로 출산율 1.26명, 출생아 49만 7천명까지 반짝 치솟았다가 약발이 빠진 2008년에[5] 1차, 2차인 2009년에는 세계금융위기 여파로 1.15명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2000년대에 전반적으로 불임, 난임과 관계 없이 개인의 선택으로 자녀를 낳지 않는 부부도 등장했다. 불임, 난임이 아닌데도 자녀양육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희생하기 싫어하거나, 사회생활 문제에 대한 고려, 자녀 양육비와 교육 문제, 양육환경과 인프라 등에 부담감을 느끼거나 등 다양한 이유로 출산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시기 출산율에 한가지 고려사항이 있다면, 1980~1990년대까지 여성 출산인구가 대부분 20대였지만[6] 이후 출산연령이 올라가면서 20대 때는 출산을 안하다가 30대가 되어서야 출산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이러한 과도기적인 시기의 20대들로 인해 출산율이 줄어들 수 밖에 없기도 했다. 다만 이후에도 출산율이 크게 오르지는 않은만큼 주요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2.9. 2010년대[편집]

2.9.1. 2010년~2014년[편집]

  • 2010년에는 1979년~1982년생의 백호랑이해 출산 붐으로 출산율이 전년 대비 0.08명이 오른 1.23명을 기록했다.[7]
  • 이듬해인 2011년에는 출산율이 1.24명으로 더 올라갔고, 2012년에는 흑룡해라는 속설로 출산율이 1.30명을 기록, 2001년 이후 11년만에 최고 출산율을 기록했다.[8][9]
  • 하지만, 2013년 출산율은 1.19명으로 다시 감소했다. 2014년에는 1.21명으로 다시 증가했지만 출생아수는 오히려 감소하고 말았다.

2.9.2. 2015년[편집]

마지막으로 출산율이 증가한 해로 합계출산율 1.24명으로 2013~2014년대비 늘었다.

하지만 2015년 12월을 시작으로 2022년 11월 현재까지 출생아 수의 전년 동월 대비 감소가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월별 출생아 수]
 

2.9.3. 2016년[편집]

2016년은 출산율 1.172로 연초부터 출생아가 최저를 경신하더니 12월까지 총 406,243명을 기록했다. 10월부터의 출생아 수 급감을 1980년대 중반생[11]들이 출산 세대에 진입한 것을 원인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12]

하지만 애초에 가임기 여성이 줄어, 출산율이 높아져도 출생아 수가 반등할 거라 보는 시각은 회의적이다.[13] 어찌되었든 통계청은 앞으로 40만둥이들이 애들을 낳기 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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