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40회 작성일 23-03-03 17:07본문
1. 개요[편집]
조혼(早婚)은 현대의 의미로 혼인적령기에 이르지 않은 미성년자가 결혼하는 것으로, 반대말은 만혼(晩婚)이다.
전세계 여성 5명 중 1명이 성인이 되기 전 결혼했다.[1] 2초에 1명꼴로 어린 신부가 생겨나고 매년 3만 5천 명의 여아들이 조혼을 한다. 당연히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거나 힘이 있는 성년이 아니니,[2] 부모와 어른들의 강요로 결혼하는 것이다.
단어의 정의상 성년의 연령이 몇 살인가에 따라 조혼의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전근대에는 전세계적으로 가임기가 되면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가임기 이전에 하는 결혼을 조혼으로 여겼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2차 성징 이전, 그러니까 여자의 경우 초경 이전의 결혼은 어느 사회에서도 조혼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이건 개인차가 있는지라 현대 선진국들에선 해당 국가의 법으로 성인[3]이 되기 이전에 하는 결혼을 조혼으로 간주한다. 또한 여자 어린이의 조혼이 주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에 조혼이라 하면 여자 어린이의 결혼을 주로 떠올리나 성별은 상관없다. 예를 들어 여자가 20세이고 남자가 40대 후반이면 법률상 둘 다 성인이기 때문에 조혼이 아니다. 반대로 여자가 20세여도 남자 쪽이 18세 미만이면, 현행법상 남성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남성 한정으로 조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남녀가 모두 15세라면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조혼이지만 조선시대였다면 지극히 평범한 결혼이다.
일반적으로, 대가족제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조혼이 성행한다. 즉 남자의 입장에선 성인이 되지 않아도 대가족의 일원으로서 아내를 부양하는 게 가능하고, 시가(媤家)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여자아이가 어릴수록 자기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게 쉬우므로 조혼을 선호하게 된다. 다만 여자아이가 성인이 된 뒤까지는 기다려 주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부부의 나이 차는 보통 15~20세 정도다. 나이가 비슷한 미성년자끼리 결혼하기도 했지만 나이차가 심한 경우도 많았다.
여자가 어린 경우 보통 여성의 초경 이전에는 결혼만 해놓고 성관계는 초경 이후로 미뤘으나, 남자 쪽이 어린 경우 대충 남자가 10대 초반만 되면 바로 관계를 맺도록 시켰다. 의료 수준이 열악했던 전근대에는 언제 어떤 병으로 후계자가 죽을지 몰랐기에 최대한 빨리 자손을 남길수록 가문 유지에 유리했기 때문으로, 이런 이유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왕자들은 대체로 10대 중반의 나이에 10대 후반 정도의 연상 여성과 결혼했다. 또 여기에는 여자 어린이가 지나치게 일찍 성관계를 한다면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는 반면 남자 어린이는 성관계를 일찍 해도 문제가 없다는 편견도 작용했는데, 실제로는 남자 어린이도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성인 여성과 관계를 맺은 충격으로 발기부전 등의 문제를 겪는 경우가 있었다.
정략결혼인 경우 결혼을 통한 두 가문의 정치적 동맹이 목적이기에 심하면 양쪽 모두 5살도 되지 않은 유아일 때 무작정 결혼부터 시켜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정략결혼을 하자고 약혼만 해둘 경우 어릴때 둘 중 하나가 병으로 죽거나 해서 동맹이 깨져버릴 수도 있고, 사춘기가 될 경우 자기 의사로 다른 사람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정략결혼을 안 하겠다면서 야반도주를 하거나 혼전임신 등의 사고를 쳐서 동맹을 위태롭게 할 위험도 있다.
전세계 여성 5명 중 1명이 성인이 되기 전 결혼했다.[1] 2초에 1명꼴로 어린 신부가 생겨나고 매년 3만 5천 명의 여아들이 조혼을 한다. 당연히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거나 힘이 있는 성년이 아니니,[2] 부모와 어른들의 강요로 결혼하는 것이다.
단어의 정의상 성년의 연령이 몇 살인가에 따라 조혼의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전근대에는 전세계적으로 가임기가 되면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가임기 이전에 하는 결혼을 조혼으로 여겼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2차 성징 이전, 그러니까 여자의 경우 초경 이전의 결혼은 어느 사회에서도 조혼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이건 개인차가 있는지라 현대 선진국들에선 해당 국가의 법으로 성인[3]이 되기 이전에 하는 결혼을 조혼으로 간주한다. 또한 여자 어린이의 조혼이 주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에 조혼이라 하면 여자 어린이의 결혼을 주로 떠올리나 성별은 상관없다. 예를 들어 여자가 20세이고 남자가 40대 후반이면 법률상 둘 다 성인이기 때문에 조혼이 아니다. 반대로 여자가 20세여도 남자 쪽이 18세 미만이면, 현행법상 남성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남성 한정으로 조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남녀가 모두 15세라면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조혼이지만 조선시대였다면 지극히 평범한 결혼이다.
일반적으로, 대가족제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조혼이 성행한다. 즉 남자의 입장에선 성인이 되지 않아도 대가족의 일원으로서 아내를 부양하는 게 가능하고, 시가(媤家)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여자아이가 어릴수록 자기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게 쉬우므로 조혼을 선호하게 된다. 다만 여자아이가 성인이 된 뒤까지는 기다려 주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부부의 나이 차는 보통 15~20세 정도다. 나이가 비슷한 미성년자끼리 결혼하기도 했지만 나이차가 심한 경우도 많았다.
여자가 어린 경우 보통 여성의 초경 이전에는 결혼만 해놓고 성관계는 초경 이후로 미뤘으나, 남자 쪽이 어린 경우 대충 남자가 10대 초반만 되면 바로 관계를 맺도록 시켰다. 의료 수준이 열악했던 전근대에는 언제 어떤 병으로 후계자가 죽을지 몰랐기에 최대한 빨리 자손을 남길수록 가문 유지에 유리했기 때문으로, 이런 이유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왕자들은 대체로 10대 중반의 나이에 10대 후반 정도의 연상 여성과 결혼했다. 또 여기에는 여자 어린이가 지나치게 일찍 성관계를 한다면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는 반면 남자 어린이는 성관계를 일찍 해도 문제가 없다는 편견도 작용했는데, 실제로는 남자 어린이도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성인 여성과 관계를 맺은 충격으로 발기부전 등의 문제를 겪는 경우가 있었다.
정략결혼인 경우 결혼을 통한 두 가문의 정치적 동맹이 목적이기에 심하면 양쪽 모두 5살도 되지 않은 유아일 때 무작정 결혼부터 시켜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정략결혼을 하자고 약혼만 해둘 경우 어릴때 둘 중 하나가 병으로 죽거나 해서 동맹이 깨져버릴 수도 있고, 사춘기가 될 경우 자기 의사로 다른 사람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정략결혼을 안 하겠다면서 야반도주를 하거나 혼전임신 등의 사고를 쳐서 동맹을 위태롭게 할 위험도 있다.
2. 사례[편집]
2.1. 아시아[편집]
司馬溫公曰, "... 今令文男年十五, 女年十三以上, 並聴婚嫁. ..."
(사마온공이 말했다. "(전략) 지금의 법령은 남자가 15세, 여자가 13세 이상이면, 모두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을 허락한다. (후략)")《주자가례》, 《권3 昏禮》(번역은 임민혁 역 153면에서 전재). 흥미로운 것은 발언의 맥락인데, 《예기》에서는 남자는 30세, 여자는 20세에 결혼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때와는 시대가 다르니 '가례'에서 '혼사를 논하는 것은 남자는 16~30세, 여자는 14~20세에 한다'라고 한 것은 양자를 절충한 것으로서 타당하다고 평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농어촌지역에서 현재 전통적인 인식의 조혼이 일어나기도 한다. 1990년대 이후 성별 선택 낙태로 2010년대까지 출생성비가 극악해진데다가 그나마도 여자들은 대도시 지역으로 몰려들기 일쑤라 여자들이 더욱 귀해졌고, 이 때문에 아들 있는 잘 사는 집안이 어린 여자아이를 구해 며느리로 삼는 것이다. 이런 어린 며느리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에서, 혹은 인신매매로 구한다. 이것을 중국 정부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위낙에 국제결혼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노총각 수가 많은지라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는 중이다.
아랍이나 인도, 서남아시아 등 아시아에서도 은근히 많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같은 섬나라에서도 치뤄진다고 한다.
아랍권에서는 조혼문제는 주로 빈곤문제와 연관이 깊다.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처럼 잘사는 나라에서는 조혼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중간급의 경제수준을 지닌 나라 정도는 조혼이 꽤 이루어지고 있고 예멘이나 수단, 모리타니처럼 극도로 못사는 나라에서는 조혼이 굉장히 흔해진다.[4] 가난한 집안에서 자식교육에 신경쓸 여유가 안 되니 딸을 일찍 시집보내서 지참금을 미리 받아 생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남성들도 성인여자와 결혼하는것보다는 지참금이 상대적으로 싸기때문에 인식이 좋지 않으면서도 적지 않게 찾아가는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딸들의 의사가 무시되는 건 당연지사.
예멘 같은 경우에는 12살에 강제로 결혼하는 일이 있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는데, 일단 법적으로는 17세 이상 결혼이 허용됨에도 경제사정이 위낙에 시궁창이다 보니 불법적으로 많이 벌어지는 것. 다른 나라들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에, 밤중에 서둘러 결혼하고 이웃이나 경찰에게는 먼 친척 아이라고 속이며 몇 년을 끌다가 밝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학생백과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예를 간단히나마 들며 조혼의 문제점을 설명한다. 관련기사
레바논에서는 부모의 허락이 있으면 9살에 결혼할 수 있고, 부모의 허락이 없어도 14살이면 결혼할 수 있다. # 또한 이스라엘은 혼인법에 따라 혼인증명서 발급을 정부에서 하는 게 아니라 각 종교 교단에서 하므로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성인이 되는 13살 때부터 부모의 허락이 없어도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스라엘과 레바논은 20대나 30대에 결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조혼은 일부 마을이나 자식을 교육시킬 여유가 없는 난민, 하레디 같은 일부 골수집단에서나 하는 일로 치부된다. 레바논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소녀들이 꽤 있지만 서남아시아치고 잘사는 나라라 비율이 낮은 편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도 6살인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와 결혼하였는데, 이는 반이슬람 세력의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하고, 무슬림들이 조혼을 정당화할 때 이용되기도 한다. 아이샤와의 결혼이 다른 세력의 포섭을 위한 상징적인 결혼일 뿐 실질적인 결혼의 의미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략결혼 등이 흔하던 당시 아랍인의 시선에서 봐도 이는 지나치게 어린아이와의 결혼이었고, 성관계 등 실제 부부생활은 아이샤가 9살일 때부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5]
선진국 출신의, 어린 여자를 선호하거나 자국내에서 결혼 시기를 놓친[6] 중장년 남자들이 필리핀같은 개발도상국에 들어와 부모 혹은 보육원에서 아이를 돈주고 사서 결혼식까지 올려 사회 문제화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중고등학생이나 아동과 결혼하는 정신나간 자들도 있는데, 물론 후자는 발각 즉시 처벌이지만 국적을 그 나라로 바꾸면 그런 거 없고, 사라지지도 않고 있다. 간혹 이런 나라에서 터지는 8세 소녀 임신, 12세 소녀 출산 등의 아동 성범죄 관련 사건의 상당수가 이 경우로 추정된다.
아랍권에서는 조혼문제는 주로 빈곤문제와 연관이 깊다.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처럼 잘사는 나라에서는 조혼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중간급의 경제수준을 지닌 나라 정도는 조혼이 꽤 이루어지고 있고 예멘이나 수단, 모리타니처럼 극도로 못사는 나라에서는 조혼이 굉장히 흔해진다.[4] 가난한 집안에서 자식교육에 신경쓸 여유가 안 되니 딸을 일찍 시집보내서 지참금을 미리 받아 생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남성들도 성인여자와 결혼하는것보다는 지참금이 상대적으로 싸기때문에 인식이 좋지 않으면서도 적지 않게 찾아가는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딸들의 의사가 무시되는 건 당연지사.
예멘 같은 경우에는 12살에 강제로 결혼하는 일이 있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는데, 일단 법적으로는 17세 이상 결혼이 허용됨에도 경제사정이 위낙에 시궁창이다 보니 불법적으로 많이 벌어지는 것. 다른 나라들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에, 밤중에 서둘러 결혼하고 이웃이나 경찰에게는 먼 친척 아이라고 속이며 몇 년을 끌다가 밝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학생백과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예를 간단히나마 들며 조혼의 문제점을 설명한다. 관련기사
레바논에서는 부모의 허락이 있으면 9살에 결혼할 수 있고, 부모의 허락이 없어도 14살이면 결혼할 수 있다. # 또한 이스라엘은 혼인법에 따라 혼인증명서 발급을 정부에서 하는 게 아니라 각 종교 교단에서 하므로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성인이 되는 13살 때부터 부모의 허락이 없어도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스라엘과 레바논은 20대나 30대에 결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조혼은 일부 마을이나 자식을 교육시킬 여유가 없는 난민, 하레디 같은 일부 골수집단에서나 하는 일로 치부된다. 레바논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소녀들이 꽤 있지만 서남아시아치고 잘사는 나라라 비율이 낮은 편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도 6살인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와 결혼하였는데, 이는 반이슬람 세력의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하고, 무슬림들이 조혼을 정당화할 때 이용되기도 한다. 아이샤와의 결혼이 다른 세력의 포섭을 위한 상징적인 결혼일 뿐 실질적인 결혼의 의미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략결혼 등이 흔하던 당시 아랍인의 시선에서 봐도 이는 지나치게 어린아이와의 결혼이었고, 성관계 등 실제 부부생활은 아이샤가 9살일 때부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5]
선진국 출신의, 어린 여자를 선호하거나 자국내에서 결혼 시기를 놓친[6] 중장년 남자들이 필리핀같은 개발도상국에 들어와 부모 혹은 보육원에서 아이를 돈주고 사서 결혼식까지 올려 사회 문제화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중고등학생이나 아동과 결혼하는 정신나간 자들도 있는데, 물론 후자는 발각 즉시 처벌이지만 국적을 그 나라로 바꾸면 그런 거 없고, 사라지지도 않고 있다. 간혹 이런 나라에서 터지는 8세 소녀 임신, 12세 소녀 출산 등의 아동 성범죄 관련 사건의 상당수가 이 경우로 추정된다.
2.1.1. 한반도[편집]
대한민국 민법 제807조(혼인적령) 18세가 된 사람은 혼인할 수 있다.
순우리말 가운데 감정아이라는 단어가 있다. '첫 배란 때 잉태한 아이. 즉, 초경보다 임신을 먼저 해서 낳은 아이'를 의미하는 단어다.
전근대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가임기가 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전근대 역사에서 조혼이라 함은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와 결혼해서, 그때부터 부부관계를 해서 아이를 낳은 경우다. 요즘도 빠르면 11~12세 이전부터 성에 눈을 뜨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체로 그 11~13세 즈음에 초경을 시작하는 최근에 비해, 과거에는 초경의 나이가 조금 더 늦었다. 옛날 의학서적에서도 초경의 나이를 대략 만 14~15세 경으로 잡는다. 성적 성숙은 영양 상태와 비만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영양 결핍이 거의 없는 현대에는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1학년 정도가 초경을 하는 일반적인 연령이다. 하지만 현 60대 이상 세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중학교 2~3학년, 늦는 사람의 경우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초경을 했다는 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혼례만 어려서 하고, 부부관계는 초경 이후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최소한 조선 시대에도, 자식을 건강하게 낳으려면 모체가 어느 정도 성장해야 한다는 개념은 있었다. 이 당시에는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결혼해도 엄연한 어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조혼을 한 꼬마신랑, 꼬마신부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을 하지 못해 상투를 틀지 못하거나 머리에 쪽을 못진 노총각, 노처녀들을 오히려 애 취급하거나,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는 등 지금관점에서 볼때 재미있는 일들도 있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성관계/임신/출산을 하면 어린 소녀의 몸에 엄청난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신체가 완전히 성숙하고 성장이 끝난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출산 시에 산모와 태아 모두 사망할 위험성이 성인에 비해 몇배로 훨씬 높아진다. 모체의 안전을 최대한 생각한다면 적어도 만 16세는 되어야 한다.[10]
고려 후기에 공녀 공출을 막기 위해 조혼하는 풍습이 정착되었는데, 조선이 건국된 이래 주자가례에 따라[11] 조혼을 악습으로 보고 논의하고 금지하려 했다. 하지만 갈수록 흐지부지되어 버렸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캐스트)[12]
조선 영조 시절에 한국 나이로 7살인 종단이라는 여자 아이와 소금장수 송지명이 성관계를 하여 임신한 사건이 있었다. 영조는 종단이, 송지명, 종단이의 어머니, 그리고 갓난아기인 종단이의 아들을 섬에다 나누어 귀양 보내 노비로 삼으라고 명했다.(#)
조선은 1894년의 갑오개혁 때 "남자는 20세 이상, 여자는 16세 이상이어야 혼인이 가능하다"고 법으로 공포하여 조혼을 금지하였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었다.(#) 다만 1906년에서 1910년 사이의 조선시대 임금을 제외한 백성들을 고려해보면, 조혼이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하다. #조혼을 안 하면 손주를 볼 수 없다[13][14]
1886년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였던 이화학당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어린 소녀들을 강제 조혼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재학 중 금혼'이라는 학칙을 만들기도 했다.[15] 소녀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시집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교사들은 부모를 설득하기도 하고, 심지어 방학을 없애기도 했다고.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금혼 학칙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되었고, 2003년 이화여자대학교는 금혼 학칙을 폐지하였다. 이후 기혼 여성들도 학부 신입생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대의 아줌마 신입생들, 첫 기혼 입학생 졸업 또한 금혼 학칙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던 사람들의 재입학을 허용하여, 그녀들이 뒤늦게라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정학과 입학 58년 만에 졸업한 할머니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조혼은 매우 빈번하였다.[16] 초기에는 연애 문화가 보편화되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이 시대의 조혼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큰 갈등을 야기했다. 젊은이들은 연애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윗 세대는 이미 그들이 연애에 눈 뜨기 전 나이에 결혼을 시켜 놓았거나 집안에서 정한 혼처와 결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세대 갈등을 유발했던 것. 조혼 상대에 대한 불만으로 화목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영위하거나, 이미 배우자가 있음에도 연애 욕구를 참지 못해 바람을 피우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청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7]
박정희가 첫 아내인 김호남과 이혼한 이유이다. 박정희는 나이를 먹은 후에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면 결혼하고 싶었으나, 박정희는 부모님께서 40대 중반의 나이에[18] 본 늦둥이인 탓에 죽기 전에 아들이 장가가는 걸 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아직 어렸던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김호남과 결혼시켰던 것. 둘 사이에 박재옥이라는 딸도 태어났으나, 박정희는 내내 김호남에게 무관심하며, 아내와 딸의 존재를 숨기고 이현란과 동거를 하거나, 자신의 제자인 초등학생에게 청혼까지 했지만 그녀의 부모님에게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결국 이러한 바람둥이 기질 때문에 김호남과 이혼하고 말았다.
고대에 있었다는 민며느리제는 일종의 조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의외로 한국 역사에서 사회적으로 대대적으로 조혼을 한 경우는 고려 시대에 발견된다. 원 간섭기 때 공녀로 차출되는 걸 최대한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자식들을 결혼시켰다고 한다. 조선에선 주자가례와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17세, 16세 이후에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보통 이 즈음부터 성인으로 간주했는데, 저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사례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 꼬마 신랑은 조혼 풍습으로 빨리 자손을 보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대략 신랑이 11~14살 정도이고 신부는 신랑의 나이보다 6살~10살 가량 많았다.
대한민국에선 2006년까지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나이가 여자는 만 16세, 남자는 만 18세였다.(현재 일본에서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어린 신부가 이걸 소재로 한 것이다. 2007년 이후로는 둘 다 만 18세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만 18세, 한국 나이 19세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있는 학생들이 많으므로 (빠른 연생으로 입학을 일찍 하거나 과학고등학교나 영재학교 등을 조기 졸업하더라도) 미성년자 시기로 보기 때문에 만 18세에 하는 결혼에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조혼이 딱히 범죄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 조혼을 금지한다는 직접적인 법조문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비합법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실제 대한민국 형법에서도 조혼을 가지고 처벌을 명시하는 규정은 없다. 민법에 따라 조혼은 법률혼으로 인정되지 않기는 하지만, 혼인 당사자 및 미성년자 측 보호자의 합의만 있다면 조혼관계의 당사자들이 동거를 하는 것을 국가에서 강제로 막을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민법 807조는 조혼을 금지하려고 명시되었다 보기는 무리가 있고, 18세 이상의 시민의 결혼권과 성인의 자유연애를 천명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 만일 민법 807조가 조혼을 막기 위해 제정된 조문이었다면 '만 18세 미만의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로 명시되었을 것이다.
전근대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가임기가 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전근대 역사에서 조혼이라 함은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와 결혼해서, 그때부터 부부관계를 해서 아이를 낳은 경우다. 요즘도 빠르면 11~12세 이전부터 성에 눈을 뜨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체로 그 11~13세 즈음에 초경을 시작하는 최근에 비해, 과거에는 초경의 나이가 조금 더 늦었다. 옛날 의학서적에서도 초경의 나이를 대략 만 14~15세 경으로 잡는다. 성적 성숙은 영양 상태와 비만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영양 결핍이 거의 없는 현대에는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1학년 정도가 초경을 하는 일반적인 연령이다. 하지만 현 60대 이상 세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중학교 2~3학년, 늦는 사람의 경우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초경을 했다는 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혼례만 어려서 하고, 부부관계는 초경 이후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최소한 조선 시대에도, 자식을 건강하게 낳으려면 모체가 어느 정도 성장해야 한다는 개념은 있었다. 이 당시에는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결혼해도 엄연한 어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조혼을 한 꼬마신랑, 꼬마신부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을 하지 못해 상투를 틀지 못하거나 머리에 쪽을 못진 노총각, 노처녀들을 오히려 애 취급하거나,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는 등 지금관점에서 볼때 재미있는 일들도 있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성관계/임신/출산을 하면 어린 소녀의 몸에 엄청난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신체가 완전히 성숙하고 성장이 끝난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출산 시에 산모와 태아 모두 사망할 위험성이 성인에 비해 몇배로 훨씬 높아진다. 모체의 안전을 최대한 생각한다면 적어도 만 16세는 되어야 한다.[10]
고려 후기에 공녀 공출을 막기 위해 조혼하는 풍습이 정착되었는데, 조선이 건국된 이래 주자가례에 따라[11] 조혼을 악습으로 보고 논의하고 금지하려 했다. 하지만 갈수록 흐지부지되어 버렸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캐스트)[12]
조선 영조 시절에 한국 나이로 7살인 종단이라는 여자 아이와 소금장수 송지명이 성관계를 하여 임신한 사건이 있었다. 영조는 종단이, 송지명, 종단이의 어머니, 그리고 갓난아기인 종단이의 아들을 섬에다 나누어 귀양 보내 노비로 삼으라고 명했다.(#)
조선은 1894년의 갑오개혁 때 "남자는 20세 이상, 여자는 16세 이상이어야 혼인이 가능하다"고 법으로 공포하여 조혼을 금지하였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었다.(#) 다만 1906년에서 1910년 사이의 조선시대 임금을 제외한 백성들을 고려해보면, 조혼이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하다. #
1886년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였던 이화학당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어린 소녀들을 강제 조혼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재학 중 금혼'이라는 학칙을 만들기도 했다.[15] 소녀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시집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교사들은 부모를 설득하기도 하고, 심지어 방학을 없애기도 했다고.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금혼 학칙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되었고, 2003년 이화여자대학교는 금혼 학칙을 폐지하였다. 이후 기혼 여성들도 학부 신입생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대의 아줌마 신입생들, 첫 기혼 입학생 졸업 또한 금혼 학칙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던 사람들의 재입학을 허용하여, 그녀들이 뒤늦게라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정학과 입학 58년 만에 졸업한 할머니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조혼은 매우 빈번하였다.[16] 초기에는 연애 문화가 보편화되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이 시대의 조혼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큰 갈등을 야기했다. 젊은이들은 연애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윗 세대는 이미 그들이 연애에 눈 뜨기 전 나이에 결혼을 시켜 놓았거나 집안에서 정한 혼처와 결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세대 갈등을 유발했던 것. 조혼 상대에 대한 불만으로 화목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영위하거나, 이미 배우자가 있음에도 연애 욕구를 참지 못해 바람을 피우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청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7]
박정희가 첫 아내인 김호남과 이혼한 이유이다. 박정희는 나이를 먹은 후에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면 결혼하고 싶었으나, 박정희는 부모님께서 40대 중반의 나이에[18] 본 늦둥이인 탓에 죽기 전에 아들이 장가가는 걸 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아직 어렸던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김호남과 결혼시켰던 것. 둘 사이에 박재옥이라는 딸도 태어났으나, 박정희는 내내 김호남에게 무관심하며, 아내와 딸의 존재를 숨기고 이현란과 동거를 하거나, 자신의 제자인 초등학생에게 청혼까지 했지만 그녀의 부모님에게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결국 이러한 바람둥이 기질 때문에 김호남과 이혼하고 말았다.
고대에 있었다는 민며느리제는 일종의 조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의외로 한국 역사에서 사회적으로 대대적으로 조혼을 한 경우는 고려 시대에 발견된다. 원 간섭기 때 공녀로 차출되는 걸 최대한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자식들을 결혼시켰다고 한다. 조선에선 주자가례와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17세, 16세 이후에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보통 이 즈음부터 성인으로 간주했는데, 저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사례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 꼬마 신랑은 조혼 풍습으로 빨리 자손을 보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대략 신랑이 11~14살 정도이고 신부는 신랑의 나이보다 6살~10살 가량 많았다.
대한민국에선 2006년까지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나이가 여자는 만 16세, 남자는 만 18세였다.(현재 일본에서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어린 신부가 이걸 소재로 한 것이다. 2007년 이후로는 둘 다 만 18세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만 18세, 한국 나이 19세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있는 학생들이 많으므로 (빠른 연생으로 입학을 일찍 하거나 과학고등학교나 영재학교 등을 조기 졸업하더라도) 미성년자 시기로 보기 때문에 만 18세에 하는 결혼에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조혼이 딱히 범죄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 조혼을 금지한다는 직접적인 법조문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비합법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실제 대한민국 형법에서도 조혼을 가지고 처벌을 명시하는 규정은 없다. 민법에 따라 조혼은 법률혼으로 인정되지 않기는 하지만, 혼인 당사자 및 미성년자 측 보호자의 합의만 있다면 조혼관계의 당사자들이 동거를 하는 것을 국가에서 강제로 막을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민법 807조는 조혼을 금지하려고 명시되었다 보기는 무리가 있고, 18세 이상의 시민의 결혼권과 성인의 자유연애를 천명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 만일 민법 807조가 조혼을 막기 위해 제정된 조문이었다면 '만 18세 미만의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로 명시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형법 제305조(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
① 13세 미만의 사람에 대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297조의2, 제298조, 제301조 또는 제301조의2의 예에 의한다. <개정 1995. 12. 29., 2012. 12. 18., 2020. 5. 19.>
② 13세 이상 16세 미만의 사람에 대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19세 이상의 자는 제297조, 제297조의2, 제298조, 제301조 또는 제301조의2의 예에 의한다. <신설 2020.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