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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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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57회 작성일 23-02-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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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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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더 낳고 그만 두겠어요"
차범근과 그의 아내 오은미 씨, 장녀 차하나 씨와 같이 등장한 산아 제한 캠페인 포스터.
하지만 정작 차붐은 이후 에 셋까지 더 낳는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1980년대 정부가 내세웠던 대표적인 가족계획 캠페인 표어

대한민국에서, 1983년 계해년(癸亥年)부터 1990년 경오년(庚午年)까지 일어난 출산율 하락 현상 및 저출산 경향.[1]

2. 상세[편집]

연도별 출생자 수 참고

1960년대부터 가족계획(산아제한정책)을 해왔지만, 그 성과가 미미하자 1970년대부터는 둘 낳는 집안은 각종 혜택을 본다는 식으로 강력하게 권장하였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 인구들이 출산할 시기가 되어도 출생자가 좀처럼 줄지를 않자 결국 1980년대와서는 '하나씩만 낳자'고 매우 강력하게 나갔다. 이로 인해 1983년에는 합계 출산율이 인구 대체 마지노선인 2.1명에 조금 미달했다가(2.06명 769,155명)[2][3], 이듬해인 1984년부터는 그보다 훨씬 아래(1.74명 674,793명)로 떨어졌다.[4] 특히 1987년의 출산율(1.53명 623,831명)은 1997년의 출산율과 비슷한 수준.[5] 1988년부터 1990년까지는 출산율이 다시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기는 했지만 0.01~0.02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1985~1990년 중에는 출산율이 세계 하위 10~20위 사이를 기록하는 등 선진국도 아닌 주제에 거의 꼴찌였다.[6] 그리고 1991년이 되어서야 산아제한 정책이 중단되어 출산율이 1.7로 오르고 출생아 수가 70만명대로 올랐다. 당시 출산 가능 연령대 인구에 1차 베이비붐 세대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태어난 아이의 수는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 때까지의 출산율[7]을 생각해보면 심각하게 낮은 수준이었다. 더불어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형제가 없는 외동인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지금 전세계 기준으로 외동 인구 비율(30대 이하)로 따진다면 2위일 정도로 흔하다고 한다.[8] 그리고 1980년대 중반생 이후의 인구 급감과 여자들도 점점 30대 초중반 이후에 결혼하는 추세라 2017년 이후로 인구 감소폭이 매우 가파라졌다. 그러다가 인구가 다시 증가하는 해인 1991~1997년생의 여성들이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2020년대 중반이 되면 코로나19로 인해 감소했던 결혼 건수가 다시 반등하고 결혼적령기 여성의 증가로 2020년대 중반의 출생자 수가 2020~2022년보다 조금은 늘어날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2002~2016년과 비교했을 때 출산율 자체가 차이나다 보니 2023년생 이후의 출생아 수도 2002~2016년생 출생아 수만큼은 늘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출생아 수로는 이 시기는 연평균 66만명으로, 2차 베이비붐 세대(1979~1982년생, 연평균 86만명)와 에코붐 세대(1991~1997년생, 연평균 71만명)보다 적다.

다만 당시 산아제한 정책을 느슨하게 시행시킨 일부 시골 소도시 지역이나 특히 제주도 전 지역[9]의 경우 평균 출생아 수가 2.0명을 훌쩍 넘긴 2명대 중반이었으나 이들 지역도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2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렇게 1980년대 이미 대체출산율 2.1명 이하로 떨어졌지만 당시 정부에선 1996년까지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는 오판을 하고 만다.[10] 이런 정부의 오판은 1990년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1996년에 와서야 겨우 산아제한 정책을 폐기하였다.

1990년에 산아제한 정책을 실질적으로 중단하자 1991년 이후 늦둥이 출산이 급격히 늘어 출산율과 출생아 수가 반등하는 현상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외환위기 이후에도 밀레니엄 베이비 유행이 끝나고 난 2002년 이후이며, 1992년까지는 출산율이 다시 늘어났고 1995년까지는 출생아 수가 70만명을 넘겼기 때문에 오히려 산아제한을 너무 일찍 종료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11] 다만 늦둥이 출산이 반짝 늘은 것으로 출산율이 안정화될 수 있는게 아니었던 데다, 산모가 될 인구가 빠르게 줄어드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별 의미 없는 주장이었다. 이후 2002년부터 출산율은 급락하고 만다.[12]

2002년에 출산율이 1.18명을 찍어 초저출산으로 돌입하자 뒤늦게나마 출산장려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13] 하지만 그 이후에도 출산율은 큰폭으로 올라가지 않고, 1.1~1.2명대 정도에 머물고 있다.[14] 그 이후 등락을 반복하다가 2018년 1.0명이 붕괴해 0.98명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 태어난 남성들이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는 2000년대 중반부터 병무 대상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90년대 중반이었다면 절반 정도가 방위로 빠졌을 남성들이 2000년대 중반부터는 얄짤없이 현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15] 이로 인해서 이 시기부터 현역 기준이 많이 완화되었다. 병역비리 등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여러 가지 병역 면제나 보충역 대상이었던 신체/장애/학력미달 기준이 줄줄이 강화/삭제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중반생들의 인구가 조금 많은데다가 현역판정률이 90%를 넘어가다 보니 부적합한 자들까지 억지로 징병한 부작용으로 수많은 사건사고[16]로 진통을 겪으면서 저출산의 장기적 대책 겸 해서 60→50만명으로의 적정 군사규모 하향조정(군축)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으로 기준이 올라가기는 했다. 물론 이 세대가 병역을 끝내는 2020년 이후에는 오히려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가용가능한 인적자원은 징병할대로 징병한 상태[17]라 한계는 명백할 것으로 보인다. 복무기간을 늘리거나 여성징병제로 가거나 국방비를 증세 또는 국방비 중 인건비의 비중을 상향조정 하는 방식으로 처우를 개선하여 직업군인 및 자원입대자를 늘리는 방향[18] 정도의 대안이 추진될 것으로 사료된다.

이 시기에는 낮은 출산율과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한 낙태 문제가 겹쳐서 남초 현상이 매우 심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 남아선호 사상 그 자체로는 남초 현상을 유발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현대의학의 발달로 태아의 성별을 미리 감별할 수 있게 되면서 딸을 임신하면 낳는 게 아니라 아예 낙태 시켜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급격하게 성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19]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에게 큰 해악을 끼치기 시작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 참조. 물론 현 세대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줄어들고 워낙 출산율이 줄어들어 낙태가 남초 현상을 유발한다고 볼 수 없지만 2010년 기준으로 셋째 출산성비는 약 109(남자 52.15%, 여자 47.85%)로 자연성비 이상을 보여주고 있기에 여전히 위험성은 도사리고 있다. 2017년 들어 셋째 성비도 107(남자 51.69%, 여자 48.31%) 밑으로 떨어졌다. 다만, 2017년 이후로는 자녀를 3명 이상 낳는 케이스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또한 이 시기에 태어난 학생들이 주로 보는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지원자 수와 응시생 수가 70만명을 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저출산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1982년생들이 주로 응시했던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2000년 11월 시행)부터 매년 응시생 수가 감소하였으며[20], 1990년생들이 주로 응시했던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2008년 11월 시행)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이는 출산율 이외에도 대학입시 정책의 변화 등도 한몫하였다. 또한 2016년에 역대 최저 출생아 수를 기록했던 것도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 무렵에 출산 세대로 진입해서라는 분석도 있다.[21]

그리고 30대 이후 성인이라면 각자 자신이 졸업한 초, 중, 고등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최신 입학 인원수가 몇 명인지 검색해 보자. 아무리 못해도 30~40%, 심한 곳은 70% 넘게 줄어있을 것이다. 물론 동탄신도시나 세종특별자치시 같은 신흥 신도시의 경우 감소폭이 작거나 오히려 증가할 수 있으나[22], 대한민국 초, 중, 고등학교의 90% 이상 해당하는 얘기라 생각하면 된다. 서울/강남은 이 문제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한 학년에 심하게는 20반까지 있던 학교의 학급 수가 많아봐야 6~7학급이 된 것을 보면 저출산이 확실히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전세버스의 경우 28인승 우등고속형 차량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고급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 주 원인이 아니라[23] 저출산으로 인해 학급 인원 수가 25명 선으로 줄어서가 주 원인이다.[24] 담임교사 합해도 28석을 다 못 채우는데 영리가 제1의 목표인 전세버스 회사 입장에서는 45인승 버스를 넣으면 인원은 적은데 좌석이 좁다고 고객들이 기피하게 된다.[25] 

3. 평가[편집]

3.1. 옹호[편집]

인구 대처 문제에 대해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 아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기는 뭐한 것이, 당시 경제정책 담당자들의 인구관이 맬서스의 이론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구호가 1984년 국민총생산으로 미국 수준의 개인소득을 올리려면 1천만 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일 정도로 인구 압력에 대해 무척 민감했다. 당시 담당자들의 인식으로 인해서 김종인의 얘기에 의하면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졌으니 산아제한을 슬슬 폐기해야 되지 않나'라는 투로 얘기를 해놓았다가 철저하게 박살이 났다"라는 지금보면 도저히 웃지못할 얘기도 있었다(...). # 그 만큼 당시 당담자들의 인식이 맬서스 트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당시 북한 경제가 급속도록 어려워지면서 구 동구권처럼 북한도 붕괴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던 때였다. 따라서 통일도 염두에 두었던 것. 하지만 폐쇄적인 북한 체제 특성을 고려하면 동구권과 다르게 예측이 빗나갔다.

물론 당시 담당자들이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데 있어서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만 하더라도 2020년에 인구 120억을 예측하기도 했으며, 국제적으로 산아제한정책을 강조하였다.[26]

다만 1974년 UN 인구 컨퍼런스에도 이미 발전은 최고의 피임약이라며 경제성장이 자연스레 저출산을 유도하리라는 시각은 있었다. # 그래도 저출산을 추구하는 정책이 추구된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는 남아선호사상,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제외하면 다산을 할 요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교육과 물질의 번영을 추구하던 당시의 사람들은 다산을 어려워 했고, 다산 자체가 부모와 자식의 끈끈한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가족관에도 근원적으로는 어긋났다. 이런 무엇이든 해줘야 한다는 가족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 나라는 한없이 좁은 것이고, 물질도 부족한 것이다.

관료부터 일반 시민까지 한 마음으로 생각하여 경제성장이 있으면 저출산이 유발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자식이 귀하게 크는 것이 이상적인 양육이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사회가 원하는 아이의 기준이 높아져 저출산이 있겠지만, 일단 자신의 가족을 소중히 여길 것을 생각하면 남은 못 낳는 것은 상관않고 자신의 가족은 번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프랑스 같은 나라의 출산 정책도 한국에 알려져 있었지만 국민들은 이를 대놓고 반대했다. 심지어 민주화 요구가 있을 때도 저출산 경향을 아예 멈춰야 한다는 인식은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3.2. 비판[편집]

이미 1983년 출산율이 대체출산율인 2.1명 수준으로 떨어진 이상, 산아정책을 즉각 폐기하지 않은 건 당시 정부의 책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당장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참고하는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 1957년 출산율이 대체출산율까지 떨어지자 1962년에 산아제한 정책을 폐기해 1974년까지 2.0~2.1명대로 유지했지만[27] 이후 1970년대 중반 오일쇼크에 의한 경제 악화로, 1980년대 버블경제 탓에 집을 구하기 어려워진 청년들의 결혼 기피로 이미 1980년대에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또한 프랑스만 해도 출산율이 1.87명으로 떨어지자 바로 1983년부터 적극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사례만 검토를 했어도 지금 당장 인구가 늘어난다고 대체출산율을 넘어 씨를 말려버릴 기세로 산아제한 정책을 지속하는 무리한 정책은 펴지 않았을 것이다.

산아제한정책이 폐지된 해는 1996년인데 늦어도 너무 늦은 선택이었으며, 1997년에 IMF 외환위기까지 터져서 기업이 파산하고 실업자들이 대량으로 양산까지 되었으니 한가하게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경제적 위기는 출산율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3저호황시절에 산아제한정책을 폐지했더라면 적어도 일본하고 비슷한 수준의 출산율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산아제한정책의 실질적 폐지는 1990년이었던만큼 대체출산율 정도를 기록한 1983년에 산아제한정책을 폐지하지 않은 것, 그리고 1984년에 대체출산율 미만으로 내려갔는데도 출산장려정책을 2003년에야 시작한 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그 출산장려정책으로도 초저출산을 한번도 탈출하지 못하다가 0명대로 진입했으므로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통일을 염두에 둔 까닭도 있었다고 하는데, 출산율이 대체출산율인 2.1명 이하로 떨어진 1983년에는 아직 소련이나 동독이 건재하던 상황이었는데다 북한의 경제도 고난의 행군 이전이라 그적 저럭 괜찮았기에 단순히 통일에 대해 근거 없이 낙관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게다가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동시기 서독처럼 통일을 위한 활발한 교류나 지원 활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막연히 통일이 되겠거니 생각하면서 정책을 짰다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설령 막연한 바람대로 통일이 됐다 하더라도 당시 북한 또한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이미 1985년에는 북한 합계출산율이 2.36명이었으며 이후 계속 감소했다. # 1985년 남한의 합계 출산율이 1.60명이었던데다 남한 대 북한 인구비가 2:1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1980년대에 오면 출산율 문제에 있어서 통일도 답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28]

물론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당시 1인당 GDP를 늘리기 위해선 인구가 줄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름 힘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주로 출산율이 4~5명대에 달하는 후진국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70년대는 이 주장에 부합했을지 몰라도 1980년대엔 아니었다. 또한 출산 제한을 통한 인구 감소는 전세대에서 동일한 비율로 줄어드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제는 경제활동인구(만 15세 이상 만 64세 이하)가 비경제활동인구(만 15세 미만, 만 65세 이상) 뒷받치는 구조라는 거다. 윗세대 인구는 많은데 아랫세대 인구는 적은 구조가 이어지면 인구 많은 세대가 비경제활동인구가 되었을 때 아랫세대들의 부담은 점점 커진다. 이는 당연히 국가 경제에 큰 리스크가 되고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이 앞둔 상황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이미 80년대에 출산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따져봐도 1970년 출생자가 100만명이 넘었는데 1987년 출생자는 62만명이었다. 이게 훗날 문제가 될 것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 건 그 당시 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는 바뀐 세태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다른 나라 사례들을 참고하면서 기존의 출산 정책을 수정할 의무가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아니면 당장의 물질적 번영을 추구한다는 인기에 영합하는 행태로 이전 정책을 답습하기만 했던 것은 옹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남아선호사상을 없애는 캠페인은 60년대부터 했는데도[29] 실패하여 성비 불균형을 유발하기도 하여 아랫세대에게 더 부담을 안겨주었다.

세월이 흘러 이들이 출산적령기(30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출생아수가 점점 줄어드는데 3차 베이비붐세대(1979~1982년생)의 출산이 한창인 2010~2012년을 정점으로 47~48만명이었던 출생아수가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내려갔다.[30]

한가지 일화로 1986년에는 주교위원회 가정사목담당 박토마 주교(춘천교구장)가 11월 26일 '하나낳아 알뜰살뜰'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80원짜리 우표를 가톨릭신자들이 사용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 물론 이 담화문 자체는 천주교의 종교적 입장(낙태반대) 표명이긴 하다. 그런데 그걸 차지하더라도 시대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데, 당시 우편이 주요 통신수단인 시대에 우표로 정부정책을 홍보할 정도면 정부의 책임은 매우 분명하다.

4. 후유증[편집]

성비 불균형 문제를 막기 위해 1987년에 아예 태아의 성별감별을 금지하고 의사가 태아의 성별을 알더라도 가족에게 알려주지 못 하도록 법을 만들었지만 속이거나 거꾸로 말하라고 한 적은 없었으니까 돌려 말하면 되었다.. 남초 현상은 오히려 심화되었다.[31]

1990년 실질적인 산아제한 완화조치를 취한 직후인 1990년대 초반에는 오히려 출산율이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1991년에는 출산율이 1.71명을 기록해 전년 대비 0.14명 상승했으며 1992년(1.76명 730,678명)의 출산율은 1984년보다도 약간 높았다. 하지만 1993년 이후로는 다시 감소세로 접어들었기에 일시적인 반등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90년부터 피임약과 피임기구 보급 사업비를 절반가량 줄여서 가족계획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도 한몫했다.[32]

개선되지 않는 국가차원의 문제로[33] 1990년대 중반(공식적으로 1996년당시 기사) 이후 산아 제한 정책을 멈춘 뒤에도 계속 출산율이 감소했으니 단지 산아 제한 때문에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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