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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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700회 작성일 23-04-03 15:19본문
1. 개요[편집]
조선족(朝鮮族, 간체 : 朝鲜族, 차오셴쭈)[9][10]은 한민족계 사람이 여러가지 요인으로 한민족계 국가들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지역으로 이주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획득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보통 한국의 구한말 시기부터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사이까지 중국인이 된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연변 조선족들이 일반적인 조선민족 구성원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문화대혁명 시기이기 때문이고, 문화대혁명을 기점으로 북한의 본토 조선인과의 교류가 대폭 감소하여 정신적으로 큰 차이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공인한, 중화의 56개의 민족들 가운데 하나이며, 중국 내에서 표기하는 조선족은 보통 중국 국적자만을 의미한다.[11] 이들 조선족의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특별 대우[12]로 대한민국에 거주 중이며, 이들 상당수는 한국에 동화되지 않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본래 구한말 당시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만주와 간도로 넘어간 조선인들 중 상당수가 지금의 남한인에 해당하는 기호 지방과 호남 지방 출신이었지만, 일제의 패망 이후 한반도 남부 출신들은 대부분 귀국한 탓에 광복 이후 현재의 조선족들은 북한인에 포함되는 함경도 지역이나 평안도 지역 출신의 후예들이 많다. 따라서 다수의 조선족들은 함경도 사투리나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대부분 연변 사람들이고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주로 랴오닝성 심양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지위를 갖는다.중국민족문화리소스 - 당대 조선족 인구 발전현황에 의하면, 조선족의 인구는 약 14억명의 전국 총 인구의 0.14%, 전국 소수민족 인구의 1.61%, 13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중국내 조선족의 인구는 2010년 기준 1,830,929명이고, 2021년 기준 1,702,479명으로 감소 추세에 있다. [13] 조선족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구[14]로서 특별한 의의가 있고, 그 외에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따로 있으며 기타 중국 각지에 좀 더 낮은 밀도로 퍼져있다.
이들의 정신 구조는 문화대혁명 이후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는 확연하게 달라져서, 남북한 사람들 간의 차이보다 더 심각하게 차이가 나지만, 어쨌거나 같은 구한국이나 조선에서 갈라져나온 사람들이라 한국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많으므로 대한민국에 왕래하는 사람이 많고, 이들 중에서는 한국에 장기거주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국 국적을 얻어서 한국인이 되는 것은 상당수 인원들이 원하지 않아하는데[15], 이는 북한 사람들이 탈북을 하면 당연하게 한국인으로서 살고 싶어 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대한민국 내 조선족 인구는 한중 수교 이후에 계속 증가하여 2020년 기준 약 71만 명에 달한다.
조선족 총 인구 약 250만명 중 약 170만명이상은 중국 국내에 체류 중이고, 70만명~80만명이상이 대한민국에 있는 셈이다. 일본에는 10만명이 넘게 체류 중이라고 한다. 한국 내 외국인 약 240만 명 중 약 3분의 1이 조선족이다. 연변에 있는 조선족보다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더 많다. BBC
기본적으로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화자이나, 이주한 소수민족들이 그러하듯이 2가지 언어 중 한 가지만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화자들도 제법 있다. 성장 환경에 따라서 중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다수인 곳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다.
조선족은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공인한, 중화의 56개의 민족들 가운데 하나이며, 중국 내에서 표기하는 조선족은 보통 중국 국적자만을 의미한다.[11] 이들 조선족의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특별 대우[12]로 대한민국에 거주 중이며, 이들 상당수는 한국에 동화되지 않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본래 구한말 당시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만주와 간도로 넘어간 조선인들 중 상당수가 지금의 남한인에 해당하는 기호 지방과 호남 지방 출신이었지만, 일제의 패망 이후 한반도 남부 출신들은 대부분 귀국한 탓에 광복 이후 현재의 조선족들은 북한인에 포함되는 함경도 지역이나 평안도 지역 출신의 후예들이 많다. 따라서 다수의 조선족들은 함경도 사투리나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대부분 연변 사람들이고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주로 랴오닝성 심양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지위를 갖는다.중국민족문화리소스 - 당대 조선족 인구 발전현황에 의하면, 조선족의 인구는 약 14억명의 전국 총 인구의 0.14%, 전국 소수민족 인구의 1.61%, 13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중국내 조선족의 인구는 2010년 기준 1,830,929명이고, 2021년 기준 1,702,479명으로 감소 추세에 있다. [13] 조선족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구[14]로서 특별한 의의가 있고, 그 외에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따로 있으며 기타 중국 각지에 좀 더 낮은 밀도로 퍼져있다.
이들의 정신 구조는 문화대혁명 이후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는 확연하게 달라져서, 남북한 사람들 간의 차이보다 더 심각하게 차이가 나지만, 어쨌거나 같은 구한국이나 조선에서 갈라져나온 사람들이라 한국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많으므로 대한민국에 왕래하는 사람이 많고, 이들 중에서는 한국에 장기거주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국 국적을 얻어서 한국인이 되는 것은 상당수 인원들이 원하지 않아하는데[15], 이는 북한 사람들이 탈북을 하면 당연하게 한국인으로서 살고 싶어 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대한민국 내 조선족 인구는 한중 수교 이후에 계속 증가하여 2020년 기준 약 71만 명에 달한다.
조선족 총 인구 약 250만명 중 약 170만명이상은 중국 국내에 체류 중이고, 70만명~80만명이상이 대한민국에 있는 셈이다. 일본에는 10만명이 넘게 체류 중이라고 한다. 한국 내 외국인 약 240만 명 중 약 3분의 1이 조선족이다. 연변에 있는 조선족보다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더 많다. BBC
기본적으로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화자이나, 이주한 소수민족들이 그러하듯이 2가지 언어 중 한 가지만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화자들도 제법 있다. 성장 환경에 따라서 중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다수인 곳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다.
2. 명칭[편집]
중국 외교부 대사관 - 조선족: Korean ethnic minority group
중국공산당신문망 - 당의 각항 공작 - 소수민족 - 조선족
대한제국이 존재했던 시절, 중국 대륙의 청나라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자국 내의 조선인들을 한민(韓民)이라고 불렀다. 이후 중화민국 시대에 국민당이 성립하고 이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함에 따라 중국에 거주 중인 조선인들을 한교(韓僑)라고 불렀다. 하지만 1949년에 중화민국이 국부천대로 대만 섬으로 쫓겨나고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한교(韓僑)라는 명칭은 다시 조선인(朝鮮人)으로 환원되었다.
현재와 같은 조선족(朝鲜族)이란 명칭으로 바뀐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을 전부 통제하기로 결정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들을 민족(民族) 단위로 관리하기로 구분 관리했기 때문이다. 1950년에 시작된 민족식별공작(民族识别工作) 제1단계부터 중국 내 조선인들을 조선족(朝鲜族)으로 묶어버렸다. 이후 중국에서는 중국계 조선인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민족(朝鲜民族)이라고 따로 표시하였고, 조선족(朝鲜族)으로 표시한 경우는 보통 중국의 조선족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한중수교 이후로는 한민족이라는 표현도 증가 추세에 있다.
바이두의 "한민족 우월주의(항일 관련)" 페이지
중국 본토 최대의 위키위키 사이트인 바이두 백과에 '조선족'이라고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사용자들이 달아놓은 설명이 나온다. 바이두 백과는 중국에서조차 지식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참고 자료로 사용하지 않지만 이 문서에서는 중국에서 쓰이는 보편적 명칭을 알아보기 위해서 살펴볼 가치가 있으므로 제시한다.중국내의 조선족인구이다.
중국공산당신문망 - 당의 각항 공작 - 소수민족 - 조선족
대한제국이 존재했던 시절, 중국 대륙의 청나라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자국 내의 조선인들을 한민(韓民)이라고 불렀다. 이후 중화민국 시대에 국민당이 성립하고 이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함에 따라 중국에 거주 중인 조선인들을 한교(韓僑)라고 불렀다. 하지만 1949년에 중화민국이 국부천대로 대만 섬으로 쫓겨나고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한교(韓僑)라는 명칭은 다시 조선인(朝鮮人)으로 환원되었다.
현재와 같은 조선족(朝鲜族)이란 명칭으로 바뀐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을 전부 통제하기로 결정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들을 민족(民族) 단위로 관리하기로 구분 관리했기 때문이다. 1950년에 시작된 민족식별공작(民族识别工作) 제1단계부터 중국 내 조선인들을 조선족(朝鲜族)으로 묶어버렸다. 이후 중국에서는 중국계 조선인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민족(朝鲜民族)이라고 따로 표시하였고, 조선족(朝鲜族)으로 표시한 경우는 보통 중국의 조선족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한중수교 이후로는 한민족이라는 표현도 증가 추세에 있다.
바이두의 "한민족 우월주의(항일 관련)" 페이지
중국 본토 최대의 위키위키 사이트인 바이두 백과에 '조선족'이라고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사용자들이 달아놓은 설명이 나온다. 바이두 백과는 중국에서조차 지식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참고 자료로 사용하지 않지만 이 문서에서는 중국에서 쓰이는 보편적 명칭을 알아보기 위해서 살펴볼 가치가 있으므로 제시한다.중국내의 조선족인구이다.
1. 중국 내 소수민족의 하나.
2. 조선반도[16]의 주체민족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이다.
중국에 사는 우리 겨레
한중수교 이전에는 한반도 내에 한 국가만 인정한다는 법칙이 있었기에 중국은 한국인과 한(韓)인이라는 단어를 한반도의 조선민족(朝鲜民族)계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조선인을 썼기 때문에 조선족(朝鲜族)이란 단어와 조선민족(朝鲜民族)이란 단어를 한국인과 북한인을 포함한 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뜻으로 동일시되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한중수교 이후에는 중국인들에게 한국인과 한국이라는 단어가 정착하면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중국'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중국계 조선족을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중국이 북한사람은 조선인이라고 표기하고 남한사람은 한국인으로 표기하기 때문인데. 한국인은 자신들을 한민족(韓民族)으로 표기하고 북한은 자신들을 조선민족(朝鲜民族)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중국계 조선족을 그냥 조선족으로만 표기해도 구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현재 중국 대학교의 대부분 논문은 한민족 관련 내용을 적을때 조선민족(朝鲜民族•차오셴민쭈)이나 한민족(韩民族•한민쭈)으로 표기한다.
한국 정부나 언론에서 '재중교포', '재중동포'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동포(同胞)'는 외국에 사는 한민족 전체, '교포(僑胞)'는 그중 한국 국적자를 뜻하기 때문에 둘은 좀 다르다. 그러므로 동포이되 외국국적자인 중국 조선족은 재중교포가 아닌 재중동포에 속한다.
'조선민족이 아닌 조선족은 비하 표현'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렇지만 중국어에서는 절대다수인 한민족(漢民族)도 한족(漢族)이라 부르며 만족, 장족 등에서 보듯이 모든 민족이 다 민족명 뒤에 족(族)자만 붙인다. 조선족들은 그들의 명칭을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고 중국인이나 한국사람으로 칭해주길 원하거나 조선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5천만 한국인이던 2백만 조선족이던 국적에 따라서 호칭을 명확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국 국적이면 중국인, 한국 국적이면 한국인. 한편 한국인을 중국 국적 한국/조선계 중국인을 특정하는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부르는건 확실히 문제가 있고, 중립적으로 보면 한국인, 조선족을 통틀어 한국의 민족을 뜻하는 한민족(韓民族)이나 한족(韓族) 대신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고 부르는 건 가능하다.
1948년 8월 중국 연변 지구당위원회에서 "연변 등 동북 3개성에 거주하는 조선민족 중 호적을 가진 자는 모두 중국 공민이고, 호적 없이 잠시 거주하는 자는 모두 조선교민"이라고 규정하여, 조선족과 조선 교민의 차이를 구분하였다.
조선족들 스스로도 '조선족'과 '조선민족'을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이들 스스로 조선족이자 조선민족이기도 한 만큼, '조선민족'이라는 표현으로 자신들을 정체화하는 경우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네이버 사전에서 제공되고 있는 중국어 사전의 일부를 출판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가 있다.
3. 역사[편집]
오늘날의 조선족은 만주에 잔류한 고대 고구려인, 부여인 후손 및 발해 유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거의 없다. 중세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발해부흥운동이 계속 실패하면서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귀화하거나 아니면 거란족, 여진족, 한족, 몽골족 등에 동화되어 소멸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몽전쟁 이후 몽골에 의해서 고려인들이 요동으로 많이 이주되어 정착하기도 했었으나 오늘날 조선족의 직계 기원은 조선 후기인 19세기 중후반 간도로 이주한 주민들에서 그 기원으로 주로 찾는 편이다.
만주는 대개 몽골-튀르크계 민족들이 거주하던 내몽골 동부 고원 지대 그리고 과거 고구려 영토로 대표되는, 그리고 오늘날 한민족이 거주하였던 농경에 유리한[17] 비옥한 요동 등 남부 지역 그리고 퉁구스계 삼림 수렵채집민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 영역 관련 지도와 만주 지도를 비교대조해보면 알겠지만, 한민족은 오늘날 만주라 불리는 지역 전체를 다 장악하고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 알짜배기 땅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조선족과 고대-중세 만주사를 같이 엮는 것은 오늘날 기준으로 다소 과한 민족주의 관점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오늘날 조선족 중 가장 정착 역사가 오래된 집단으로는 무려 400년전 만주에 정착한 랴오닝성 번시시의 '번시 박씨'가 있는데, 이들의 조상들은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부차(富車.현재의 랴오닝 푸순(撫順)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인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 후금의 포로가 됐던 강홍립의 부하였던 그들이 번시 일대에 정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강홍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번시 박씨의 시조는 만주에 그대로 남아 계보를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기사 KBS 뉴스기사
이후 팔기군에 합류한 조선 출신 박씨 형제들의 후손들은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분류되었다가 1958년에는 한족으로 분류되었고 다시 1982년에서야 조선족으로 재분류되었다. 특히 이중에서 번시 박씨가 만주족으로 분류되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청나라 때 편찬된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인 출신의 성씨들도 43개나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 지역에 잔류 혹은 이주했던 한민족 상당수가 만주족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18] 상술한 번시 박씨의 경우도 집성촌을 중심으로 모여살면서 외부인들과의 통혼을 최대한 제한하면서 혈통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어는 거의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였고 조선족으로 인정받고 나서야 다시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즉, 번시 박씨 집성촌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전근대 만주 지역의 한민족 이주민들은 대부분 만주족이나 한족 등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는 설명이 가능하다.[19] 다만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만주 이주는 1860년대 조선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 개척에 나선 조선인들이 그 시초였으며, 이렇게 보면 조선족의 중국 이민사는 길게 잡아도 160여년 정도이다.
근세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고 이윽고 청나라를 성립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될 것을 두려워한 청나라 황실은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만들어 한족이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 만주 봉금령은 1881년까지 유지되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쇠락하기 시작하자 러시아 제국이 만주 일대를 노리기 시작하는데 청나라 조정은 이에 맞서서 1870년대부터 만주 봉금을 단계적으로 해제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족 외에도 조선 사람들도 은근슬쩍 간도를 중심으로 이민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조선족들의 사실상의 직계 기원이 된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식습관 그대로 쌀밥을 좋아하였고 비옥한 간도 평야지대에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오늘날 중국 동북3성 지역은 중국의 주요 자포니카 품종 벼 재배지역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선은 점차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대한제국의 성립이후에 노골화되기 시작했는데, 대한제국은 이 지역에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를 파견하는 등, 해당 지역 조선인을 통치하려는 노력을 했다. 되려 청나라가 행정력유지를 할 수가 없어서 1889년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변발령을 내리는 등, 강행조치를 했는데, 오히려 이 정책이 해당지역 조선인들의 적개심을 샀고 훗날, 대한제국의 간도병합 욕망에 불을 지폈다. 이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란 정채성이 강했고,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간도병합에 소극적일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조선으로의 편입을 원했다.[20] 대한제국은 이에 호응하여 1903년 말에는 선양시 부근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으나, 1905년에 을사늑약, 1907년에 군대해산을 당함으로서 1897년부터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간도편입은 추진력을 상실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이 체결됨으로서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우리 대한민국에 포함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고 이후 조선족의 역사는 한국사와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된다. 구한말부터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조선을 떠난 사람들이 간도지역에 많이 정착했다. 경술국치이후, 생업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가난한 조선인들이 삶을 위해 조선을 탈출하여 정착하기 위하여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한족과 만주족 지주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후에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는 단초가 된다. 만주에 삶을 찾으러 나간 조선인들도 만주의 동포들에게 미쳤던 야욕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20년에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공세를 막았지만 연해주 4월 참변과 간도참변으로 만주일대로 나간 조선인에게 흉수를 저질렀다. 이렇듯이 계속해서 만주일대에 대한 침략야욕을 바탕으로 결국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오보사건부터
만주는 대개 몽골-튀르크계 민족들이 거주하던 내몽골 동부 고원 지대 그리고 과거 고구려 영토로 대표되는, 그리고 오늘날 한민족이 거주하였던 농경에 유리한[17] 비옥한 요동 등 남부 지역 그리고 퉁구스계 삼림 수렵채집민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 영역 관련 지도와 만주 지도를 비교대조해보면 알겠지만, 한민족은 오늘날 만주라 불리는 지역 전체를 다 장악하고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 알짜배기 땅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조선족과 고대-중세 만주사를 같이 엮는 것은 오늘날 기준으로 다소 과한 민족주의 관점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오늘날 조선족 중 가장 정착 역사가 오래된 집단으로는 무려 400년전 만주에 정착한 랴오닝성 번시시의 '번시 박씨'가 있는데, 이들의 조상들은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부차(富車.현재의 랴오닝 푸순(撫順)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인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 후금의 포로가 됐던 강홍립의 부하였던 그들이 번시 일대에 정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강홍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번시 박씨의 시조는 만주에 그대로 남아 계보를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기사 KBS 뉴스기사
이후 팔기군에 합류한 조선 출신 박씨 형제들의 후손들은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분류되었다가 1958년에는 한족으로 분류되었고 다시 1982년에서야 조선족으로 재분류되었다. 특히 이중에서 번시 박씨가 만주족으로 분류되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청나라 때 편찬된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인 출신의 성씨들도 43개나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 지역에 잔류 혹은 이주했던 한민족 상당수가 만주족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18] 상술한 번시 박씨의 경우도 집성촌을 중심으로 모여살면서 외부인들과의 통혼을 최대한 제한하면서 혈통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어는 거의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였고 조선족으로 인정받고 나서야 다시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즉, 번시 박씨 집성촌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전근대 만주 지역의 한민족 이주민들은 대부분 만주족이나 한족 등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는 설명이 가능하다.[19] 다만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만주 이주는 1860년대 조선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 개척에 나선 조선인들이 그 시초였으며, 이렇게 보면 조선족의 중국 이민사는 길게 잡아도 160여년 정도이다.
근세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고 이윽고 청나라를 성립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될 것을 두려워한 청나라 황실은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만들어 한족이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 만주 봉금령은 1881년까지 유지되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쇠락하기 시작하자 러시아 제국이 만주 일대를 노리기 시작하는데 청나라 조정은 이에 맞서서 1870년대부터 만주 봉금을 단계적으로 해제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족 외에도 조선 사람들도 은근슬쩍 간도를 중심으로 이민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조선족들의 사실상의 직계 기원이 된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식습관 그대로 쌀밥을 좋아하였고 비옥한 간도 평야지대에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오늘날 중국 동북3성 지역은 중국의 주요 자포니카 품종 벼 재배지역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선은 점차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대한제국의 성립이후에 노골화되기 시작했는데, 대한제국은 이 지역에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를 파견하는 등, 해당 지역 조선인을 통치하려는 노력을 했다. 되려 청나라가 행정력유지를 할 수가 없어서 1889년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변발령을 내리는 등, 강행조치를 했는데, 오히려 이 정책이 해당지역 조선인들의 적개심을 샀고 훗날, 대한제국의 간도병합 욕망에 불을 지폈다. 이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란 정채성이 강했고,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간도병합에 소극적일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조선으로의 편입을 원했다.[20] 대한제국은 이에 호응하여 1903년 말에는 선양시 부근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으나, 1905년에 을사늑약, 1907년에 군대해산을 당함으로서 1897년부터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간도편입은 추진력을 상실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이 체결됨으로서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우리 대한민국에 포함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고 이후 조선족의 역사는 한국사와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된다. 구한말부터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조선을 떠난 사람들이 간도지역에 많이 정착했다. 경술국치이후, 생업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가난한 조선인들이 삶을 위해 조선을 탈출하여 정착하기 위하여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한족과 만주족 지주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후에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는 단초가 된다. 만주에 삶을 찾으러 나간 조선인들도 만주의 동포들에게 미쳤던 야욕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20년에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공세를 막았지만 연해주 4월 참변과 간도참변으로 만주일대로 나간 조선인에게 흉수를 저질렀다. 이렇듯이 계속해서 만주일대에 대한 침략야욕을 바탕으로 결국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오보사건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