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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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1,063회 작성일 22-05-12 14:48본문
종군위안부, 위안부, 정신대, 여자근로정신대는 무엇이 다른가?
2005년 6월 11일 당시 일본 문부과학상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는 “종군위안부란 말은 원래 없었다”라는 발언으로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이 말은 당시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종군위안부’라는 말이 실려 있다가 삭제된 것에 대해서 잘된 일이라고 언급하면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원래 없었다”라고 말한 것이 ‘종군’이란 수식어가 붙은 ‘종군위안부’라는 표현 그 자체만을 지적한 것이었다면, 그의 말은 옳다. 그런데 그의 발언이 단순히 ‘종군’이라는 표현을 지적하기 위해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위안부’라는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은 물론 우리 사회 한편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은 언제 나온 것일까? 1970년대 일본에서는 중일전쟁 이래 아시아 ·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 회고담이나 논픽션, 픽션이 집중적으로 출간되었다. 이때 『종군위안부』라는 책이 간행되는 등의 흐름 속에서 일본에서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고정화되어갔다. ‘종군’이 붙게 된 것은 종군간호부, 종군기자만큼 군과 밀접하고 제도화된 존재였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종군이란 수식어가 강제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의 관련 단체들은 이 용어를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반복적 · 조직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을 꽤 오랫동안 ‘정신대(挺身隊)’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정신대라는 용어는 이름 그대로 ‘일본 국가(천황)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대’란 의미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좀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정신대라는 용어가 조선에 나타나는 것은 1940년경부터이다. 이때 정신대는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용어였다. ‘사상의 정신(挺身)부대’, ‘농촌정신대’, ‘연료(燃料)정신대’, 군부대장의 이름을 딴 ‘마쓰모리(松森)정신대’, 요리영업 종사 여성을 조직했던 ‘특별여자청년정신대’와 같은 이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신대는 보국단, 보국대라는 말과 혼용하여 일반명사로서 활용되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정신대라는 용어를 널리 쓰기 시작한 것은 1943년 이후였다. ‘여자정신근로령’이 논의되고 ‘여자근로정신대’가 조직되기 시작한 시기부터였다. 이때부터 ‘정신대’ 하면 ‘여자근로정신대’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원래 이 여자근로정신대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노동력 부족을 느낀 일제가 여성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여자근로정신대와 군 ‘위안부’의 구분이 아주 선명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를 ‘정신대’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던 이들이 자신이 정신대였다고 말하지 않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제의 여성 동원을 고려 공녀처럼 본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 ‘처녀공출’이란 말이 나왔던 것은 바로 정신대에 대한 이런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헌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던 사람 중에 군 ‘위안부’가 된 증언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 ‘위안부’가 된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에도 ‘정신대’란 용어가 쓰였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 해방 직후 신문기사에서도 귀국하는 ‘위안부’를 정신대로 불렀다. 여러 가지 이유가 함께 작용했겠지만, 군수공장에서 노동을 했을 뿐인데도,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던 여성 중에는 자신이 정신대였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숨기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정신대란 용어는 혼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군 ‘위안부’와 정신대, 여자근로정신대라는 용어는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
그러면 정작 일본군에 의해 반복적 · 조직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당시에는 어떻게 불렀을까?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군 위안부’와 ‘위안부’라고 불렀고, ‘작부(酌婦)’와 ‘창기(娼妓)’처럼 일본 공창(公娼)제도에서 쓰이던 표현이나 일반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던 표현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군이 만든 규정에 의하면 군 위안소에서는 술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군이 이들에게 붙인 이름은 ‘작부’였다.
한동안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 “위안부는 상행위를 한 것이다”, “위안부는 공창이었다”라는 말로 우리 사회를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그러면 ‘위안부’가 된 여성은 돈이나 공창제도와 완전히 무관했는가? 일본인 군 위안부의 증언은 극히 적지만, 지금까지 확인되는 바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거의 기존 성매매 관련업을 통해 ‘위안부’를 동원했다. 여자근로정신대, 정신대라는 용어와 혼용되는 예도 별로 없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위안부’를 동원하는 방식이 식민본국인 일본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의 ‘위안부’ 동원에서도 물론 사기와 같은 방식도 있었고 이러한 일로 인해 재판도 있었으며, 일본 행정경찰기관과 군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후방에 있는 일본 여성의 역할로 군수물자 생산과 후일의 병사 생산에 중요한 비중을 두었다. 때문에 일본의 일반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한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경계하면서, 되도록 성매매에 종사하던 여성들로 ‘위안부’를 충원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쉽게 관철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국제법을 위반하거나 소위 일반 여성이 동원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본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하물며 일본군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식민지나 점령지의 여성 동원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피해자임을 밝힌, 즉 커밍아웃을 한 피해자는 대부분 성매매와 관련이 없던 이들로서, 취업 사기나 물리적 폭력에 의해 동원된 경우였다. 커밍아웃을 한 피해자들에게 위안부가 되기 전 성매매 전력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초기의 ‘위안부’ 관련 연구서나 한국의 민족주의적 경향 등과 연결되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 즉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은 ‘순결한 꽃다운 처녀’였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위안부’가 된 여성들 가운데 ‘위안부’가 되기 전에 성매매업에 종사하던 여성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꽤 많은 수가 이 영역에서 공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위안부’로 동원된 이후 위안소에서 돈을 받았던 경우도 없지 않다. ‘위안부’ 여성들에게 그 돈이 직접 지불되었는가는 별도의 문제로 삼더라도, 일본군의 규정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돈을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 위안소를 감독 · 통제하는 주체는 궁극적으로 일본군이었지만, 위안소를 경영하는 주체가 꼭 일본군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직영위안소를 제외하면 관리인이 있었다. 필리핀 ·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군정감부 휘하의 일본인 실업단이 이러한 시설의 설치 및 유지 책임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종의 조합 형식을 띠며 운영하는 방식은 일본 내의 공창제도와 비슷했다.
그런데 문제는,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돈을 받았다든지, ‘위안부’가 된 여성들의 전력(前歷)이 공창이라든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운영 방식이 공창제와 유사하다는 데에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안부’ 동원과 수송, 위안소 설치, 운영 통제에 일본군과 일본 정부,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직접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와 전혀 다르다. 또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경영하지 않았다고 하여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이 면제될 것이 아니다. 일본군 수뇌부가 일본군의 성병 예방, 성욕 해결, 치안 유지 등을 목적으로 제도를 만들고, 일본 정부가 이를 위해 지원하여 일본군 ‘위안부’라는 피해자들을 만들었다는 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이러한 점을 외면하고 여성의 전력을 강조하거나 돈을 받았다, 혹은 공창제와 유사하다는 등의 특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런 방향으로 세인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위안부’ 제도의 범죄성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다.
‘위안부’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이후 이 문제와 관련된 활동의 과정을 보는 것은 한국 현대(여성)운동사의 중대한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상 이처럼 외면당하고 묻혀 있던 사실을 역사적 문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린 예도, 또 우리가 제기하여 전 세계 공론으로 확대시킨 운동도 그리 많지 않다.
용어도 운동의 확대 과정과 연동된다. 1990년대 한국, 일본, 동아시아, 그 외의 세계로 파문이 확산되어가면서, 용어 역시 정치(精緻)화 과정을 거쳤다. 운동 초기에는 ‘정신대’라는 포괄적인 용어에서 시작했지만,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운동에 역사 연구자들이 결합하면서 시대상과 결부되어 있는 역사용어로서 일본군이 만든 제도하에서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을 군 ‘위안부’나 일본군 ‘위안부’로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위안부’라는 말은 당시 군이 붙인 이름으로, 집권자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용어이다. 정작 피해 여성들은 자신들이 무엇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르는 채 있었고, 피해자의 관점은 용어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따옴표를 써서 ‘위안부’라고 쓰는 것으로 주의를 기울여왔다.
‘위안부’라는 용어를 명실상부한 적확한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꾸준히 있었다. 한일 간의 심포지엄에서 전쟁 성노예, 성노예 등의 명칭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유엔 등의 국제기구로 확대되는 과정에, 현대형노예제실무회의와 인권소위원회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자연스럽게 군대 성노예제(military sexual slavery)로 수용되었다. 이것은 일제하에 일어났다는 특수성을 가진 것이지만 전시하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다른 지역의 경험과도 연결되어 쓰이게 된 용어였다.
그러나 ‘위안부’라는 표현 자체는 적절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일제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만들어가면서 제도화했던 당대의 특수한 분위기를 전달해준다는 점, 이미 많은 이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 생존 피해자들이 ‘군대 성노예’라는 표현을 섬뜩하게 여긴다는 점 등의 이유가 있어 한국의 관련 연구자나 활동가 사이에서는 아직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군 ‘성노예’ 두 용어가 함께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