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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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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785회 작성일 22-08-3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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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600만 명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학살 대상이었다. 워낙 대규모로 저질러진 학살이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2003년 9월에 밝혀진 극비 문서에 따르면 나치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듬해인 1940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 독일 각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 27만 5,000명을 학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몬바이센텔 센터의 R. A. 쿠퍼(R. A. Cooper) 소장은 "나치 정권은 장애인 학살로 살인기술을 연마하고 정당화하는 도구로 악용했다"고 비난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인물이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 ~ 1962)이다. 그는 독일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전범이었다. 그는 독일이 패망할 때 독일을 떠나 도망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약 15년간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조직에 체포되어 9일 후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그는 1961년 4월 11일부터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미국 정치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는 『뉴요커』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 과정을 취재한 후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Bernd Schwabe/위키피디아 | CC BY-SA 3.0

아렌트가 송고한 기사는 곧 미국 전역에 걸쳐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악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인물의 '악마성'을 부정하고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학살을 저지를 당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는 평소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수행 과정에서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착한 사람이 저지른 악독한 범죄라고 하는 사실에서 연유되는 곤혹스러움은 인간의 사유(thinking)란 무엇이고, 그것이 지능과는 어떻게 다르며, 나아가 사유가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가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게 만들었다.

나치 친위대 사령관으로 유대인 대학살을 지휘했던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1900 ~ 1945)는 최근(2014년 1월) 공개된,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틀러가 내 어머니를 쏘라고 하면 난 그렇게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어머니조차 쏠 수 있다는 이 엽기적인 정신 상태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나치 친위대 사령관으로 유대인 대학살을 지휘

ⓒ Bundesarchiv/wikipedia | CC BY-SA 3.0

이삼성은 학살의 집행자 또는 하수인들은 자신들이 잔혹 행위에 개입해 있는 그 현실의 어처구니없음(absurdity in realities)을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는 인식하게 마련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된 공백을 환상으로 메우려 하는 과정에서 '위조된 세계(counterfeit universe)'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부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이 등장한다. 그중의 하나가 베트남전쟁의 경우 군인들이 애용한 헤로인과 마리화나 등의 마약 복용(pot-smoking)이었다. 독일군들은 유대인수용소에서 술과 고전음악을 즐겼으며 수용된 여성들에 대한 변태적인 성적 학대를 즐겼다. 이런 수단들을 통해서 학살의 하수인들은 스스로 '심리적 불감(psychic numbing)' 상태를 불러일으키며 정신적 공황을 메우려고 했다."

이삼성은 '심리적 불감'은 학살과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자신들의 현실을 비현실화(derealization)하는 심리적 과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과정엔 크고 작은 이데올로기와 도구들이 동원된다고 말한다. 나치스는 '새로운 독일적 냉혹성(new spirit of German coldness)'을 영웅시하는 이데올로기도 한몫을 했으며, 고전음악을 즐기는 것과 같은 심미적(審美的) 행위도 학살과 죽음이라는 현실과 그 하수인에게 불가피하게 따르는 죄의식을 초월해 더 효과적이고 냉혹한 학살기계로 자신들을 적응시키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베트콩들의 시체 수를 확인하기 위해 시체마다 귀를 잘라 모으는 짓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베트남전쟁에서도 수많은 아이히만이 존재했다는 걸 말해준다. 노인, 여자, 어린아이 등 민간인 347명을 학살한,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 사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아이히만과 관련,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 ~ 1980)은 '관료주의적 인간'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아이히만은 관료의 극단적인 본보기였다. 아이히만은 수십만의 유대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던 것이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Arturo Espinosa/wikipedia | CC BY 2.0

"그는 누구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유대인들을 죽일 때 그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그들을 독일로부터 단지 신속히 이주시키는 책임을 맡았을 때도 똑같이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는 규칙을 어겼을 때에만 죄의식을 느꼈다. 그는 단지 두 가지 경우에만, 즉 어릴 때 게으름 피웠던 것과 공습 때 대피하라는 명령을 어겼던 것에 대해서만 죄의식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죄'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즉 기술적인 일만 성실히 수행했다. 이게 곧 아이히만의 대답이기도 했다. 닐 포스트먼(Neil Postman, 1931 ~ 2003)은 "아이히만의 대답이 하루에 미국에서만도 5천 번 이상 나오고 있을 것이다. 즉 내 결정의 인간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이다. 담당자는 관료주의의 효율성을 위해 맡은 역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 뿐이며, 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범적 시민이 희대의 살인마가 될 수 있는 '악(惡)의 평범성'의 근거가 된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이후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 ~ 1984),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1933 ~ ) 등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 이어 이들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기로 하되, 한 가지는 미리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모든 건 상황에 따른 것일 뿐, 악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가? 그렇진 않다. 아렌트도 일부 가해자들의 가학 성향을 언급하면서 드물게나마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도덕성이 결여된 사이코패스의 악행을 상황 탓만으론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권위에 대한 복종 의식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사람에 따라선 그게 지나친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환기시킨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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