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강간을 바라보는 법원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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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802회 작성일 22-09-01 15:11본문
대법원 '혼인 관계 파탄' 전제로 부부강간 인정
부산지법 판결 한 달 뒤인 2009년 2월, 대법원은 또 다른 부부강간 사건 판결을 선고한다.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사례 1〉
A씨(남)와 B씨는 부부로 살다가 A씨가 장기간 성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바람에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A씨의 간곡한 요구로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고 재결합했으나 다시 두 달 만에 별거 상태에 들어간 후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법원에 협의이혼 서류를 접수한 후 A씨는 B씨를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루만 함께 보내자고 부탁했다. B씨가 차마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어서 부탁을 들어준 게 화근이었다. 그날 밤 다른 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A씨는 갑자기 야수로 돌변했다. 그는 B씨가 성관계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고 칼로 위협해 반항하지 못하게 굴복시킨 다음 성폭행했다. 이 장면을 카메라로 찍기까지 했다.
A씨는 2008년 1심(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성폭력처벌법 위반(특수강간1) , 카메라 등 이용촬영)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도 같았다.
A씨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2009년 2월 선고. 결론도 결론이지만 부부강간을 바라보는 대법원의 판시가 주목을 받는 순간이었다(참고로 대법원 판결은 하급심의 결론을 뒤집을 수 있으므로 하급심은 대법원 판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최근 대법원 판례이므로 문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혼인 관계가 존속하는 상태에서 남편이 처의 의사에 반해 폭행 또는 협박으로 성교 행위를 한 경우 강간죄가 성립하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적어도 당사자 사이에 혼인 관계가 파탄됐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지속할 의사가 없고 이혼 의사의 합치가 있어 실질적인 부부 관계가 인정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법률상의 배우자인 처도 강간죄의 객체가 된다." (대법원 1970. 3. 10. 선고 70도29 판결 참조)
제일 뒤 단락, '배우자인 처도 강간죄의 객체가 된다'는 부분만 보면 마치 부부강간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장을 전체적으로 뜯어보면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 실제로 부부 관계로 볼 수 없는 특수한 상태에서만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사실상 1970년 대법원 판결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다시 쉽게 풀어 보자. '부부강간이 성립되는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다만, 법률상 부부라도 부부 관계가 완전히 깨져서 남남 사이와 마찬가지라면 (부부라고 할 수 없으므로) 강간이 인정된다.'
사실 법원까지 오는 부부간 성폭행 사례들은 대부분 별거중이거나 이혼 직전 혹은 사실상 이혼 상태인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다. 이 사건도 그랬고, 전후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도 이 사건의 당사자인 A씨와 B씨처럼 이미 이혼소송 중이거나 그에 버금갈 정도로 혼인 파탄 상태인 부부에게는 강간이 성립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판단 범위를 더 넓혔어야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깨진 상태의 부부 말고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이 성립하는지 대법원의 판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약 40년 전인 1970년 판례(사건번호 70도29)를 따른다면서 부부강간에 대한 판단을 다음 기회로 미룬 것이다. 더구나 선고 한 달 전에 부산지법에서 대법원의 판단과 다른 판결이 나온 상태라 아쉬움은 더 컸다.
그 후로도 부부강간은 드물게나마 법의 심판대에 선다. 특이한 점은 대법원의 '애매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급심 판결에서는 부부강간을 인정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별거나 이혼이 전제되지 않은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례 2〉
20대 초반 부부 얘기다. 아내 C씨는 아기에게 젖 먹일 시간이 궁금해서 남편 D씨에게 언제 우유를 먹였는지 물어봤다. 영화를 보고 있던 D씨는 영화 감상에 방해를 받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냈고 두 사람은 다투게 됐다. C씨는 급기야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다. 나가겠다"고 소리쳤다.
화가 난 D씨는 "움직이면 아기를 다치게 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막았다. 그리고 성관계를 요구했다. C씨가 싸움 중에는 싫다고 뿌리쳤는데도 D씨는 가위로 때리고 옷을 찢어 버렸다. 그는 우는 아내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면 나랑 해야 한다"며 때려서 반항을 못하게 한 후 성폭행을 했다.
인천지법은 2010년 7월 남편 D씨에게 강간상해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판결에서 "혼인한 부부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응할 의무는 있지만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법원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배우자에게 인격체로서 대우받지 못한 처가 느낄 절망감과 수치심, 모멸감은 제3자에게 강간당한 여성의 정신적 고통보다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부간의 성이 내밀한 사생활 영역이더라도, 명백한 강간 행위를 국가가 더 이상 방관하지 아니하고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결코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2009년 부산지법과 같은 시각이다.
1심에 이어 서울고법도 2010년 12월 D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국가의 개입에 앞서 부부가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서도 D씨의 행위가 강간치상죄에 해당한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법원은 "부부 사이에 폭행을 당하면서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요구받는 경우 국가가 인권에 속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가지 않고 2심에서 확정됐다.
2010년 10월에도 아내를 성폭행한 남편에게 징역 6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됐다. 이 사건은 평소에도 아내를 상습 폭행하던 남편이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가 강간이 아닌 강제추행의 방법으로 심각한 성적 학대를 한 사실이 법원에서 인정된 사건이다. 대구지법 김천지원은 "가학적, 변태적 행위로 아내에게 극도의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며 중형 선고 배경을 밝혔다.
2013년 대법원 "부부 사이 성적 자기결정권 인정"
그 후로도 부부강간은 드물게나마 법의 심판대에 섰다. 특이한 점은 대법원의 '애매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급심 판결에서는 부부강간을 인정해가는 추세였다. 별거나 이혼이 전제되지 않은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 분위기의 영향이었을까. 다행히도, 대법원은 2013년 5월 16일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선언했다. 문제가 된 사건은 부부가 각방을 써오던 상황에서 남편이 흉기를 사용하여 아내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어 특수강간 등으로 기소된 사건이다.
그동안 대법원은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때는 설령 남편이 강제로 아내를 간음하였더라도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그런데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된 판례(대법원 1970. 3. 10. 선고 70도29 판결)를 변경하였다.
대법원은 "혼인한 부부 사이의 성생활에서도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보장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국가가 부부 사이의 내밀한 성생활에 관한 문제라는 이유만으로 그 개입을 자제한다면, 헌법이 천명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생활을 보장할 국가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남편의 성폭력이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국가가 개입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방지하고 건강한 부부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국가형벌권의 행사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도14788 판결)
법 개정도 필요 없었다. 부부강간은 이제 더 이상 논란 없이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부부 사이에도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여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면 강간이 성립된다. 하지만 대법원은 부부 사이의 성생활이라는 특성을 감안하여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부부 사이의 성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가정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최대한 자제하여야 한다는 전제에서, 그 폭행 또는 협박의 내용과 정도가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정도에 이른 것인지 여부, 남편이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혼인생활의 형태와 부부의 평소 성행,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상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또한 수사기관과 법원도 부부강간에 대해 특별한 고려를 해줄 것을 당부했다. 즉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모멸감, 배신감 등으로 부부 사이의 심리적·정신적 상처가 덧나거나 혼인의 파탄이 촉진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하고 △가정 내의 고통이 장기간 지속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해야 하며 △부부 모두 가정을 유지하려는 의사가 확고할 때에는 수사나 재판에서 중요한 요소로 반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간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이다. 죄를 지었다면 상대가 배우자건 남남이건 관계없이 처벌해야 한다. 이것을 확인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결, 비록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가정폭력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부부간 성폭행에는 관대했던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어떤 논리로도 결혼이 아내의 성을 강제로 소유하는 권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2013년 대법원 판결은 부부간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한 획기적인 판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