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psychoanalysis, 精神分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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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65회 작성일 22-09-30 14:09본문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만큼 뜨거운 감자가 있을까? 과학적 심리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상담과 심리치료(상담심리학 참조) 영역에 있는 심리학자들은 정신분석도 큰 틀에서는 심리학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심리학 이론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시작
정신분석은 비엔나 출신인 유대인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가 만든 이론이다. 그가 죽은 후 정신분석은 여러 이론으로 발전되었다. 이를 후기 정신분석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대상관계 이론, 자기심리학을 들 수 있다. 후기 정신분석과 구별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이론을 고전적 정신분석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전적 정신분석의 시작은 프로이트가 활동할 당시 유행하던 히스테리(신체 증상 참조) 덕분이다. 프로이트는 이들을 치료하면서 그 원인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 즉 무의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히스테리는 신경계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감각 기관에 이상이 생기거나 수의적 운동의 마비가 특징인 정신장애(이상심리학 참조)다.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히스테리가 단지 꾀병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프로이트는 달랐다. 과거의 상처와 갈등, 해결하지 못한 욕구가 무의식에서 존재하다가 증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최면을 사용해 환자들의 무의식에 접근하려고 했으나, 이내 최면을 포기하고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을 사용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는 방법인 자유 연상에 대해 프로이트는 인간이 적극적으로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려는 노력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자유 연상을 도입한 1896년을 정신분석의 시작 연도로 잡는다. 또한 이 해에 프로이트는 공식적으로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금기에 대한 도전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본질이 성(性)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빅토리아 문화는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느라, 인간의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코르셋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여성들은 아름다운 몸매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데 심한 경우에는 내장이 파열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왜곡된 문화에서 감춰야 했던 것은 비단 여성들의 뱃살만이 아니었다. 인간 본유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성적 욕구도 숨겨야만 했다. 누구나 성욕이 있지만, 누구나 없는 것처럼 행세했다. 당시 최고의 사회적인 금기는 성이었다.
지식인들은 성에 관한 용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의사들이 전문용어를 사용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자신의 글에서 성에 관한 단어를 모두 일상어(독일어)로 표현해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무의식에 억압된 성적 욕구와 과거의 상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의식으로 떠오르려 하고, 의식은 이를 억누르려고 해 역동이 발생한다. 의식이 무의식을 잘 견제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간혹 의식의 견제에 틈이 생기면 무의식이 의식으로 나와 꿈이나 실수 행위, 그리고 다양한 정신장애 증상을 만들어낸다.
특히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王道)’라면서, 꿈을 제대로 분석하면 무의식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크게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전의식으로 구분하는 지형학적 모형을 제안했다. 무의식을 구성하는 인간의 성적 욕구는 도대체 언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성인이 되어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당연히 어린 아이들에게 성욕이 있다는 것이다.
1905년에 프로이트는 『성에 관한 세 편의 논문(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을 통해 아이들의 성욕이 시간에 따라 입과 항문, 남근을 통해 발현된다는 심리성적 발달 이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를 악마 혹은 사악하고 음탕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와 그의 쓰레기 같은 이론을 매장시키려고 했다. 이처럼 격렬한 반대와 비난에 대해 프로이트는 자신이 불편한 진실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신분석 지지자들
정신분석에 대한 열기는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식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 중에는 일부만이 프로이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나, 대중들은 대체적으로 프로이트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문장력은 최고의 문학상인 괴테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라틴어처럼 유식한 용어가 아닌 누구나 다가갈 수 있도록 일상어(독일어)로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아, 원초아, 초자아로 알고 있는 라틴어 에고(ego), 이드(id), 슈퍼에고(superego)는 프로이트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는 이를 독일어 이히(ich), 에스(es), 위버-이히(über-Ich)로 표현했다. 영어로 하자면 I, it, over-I가 된다. 프로이트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작가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였기 때문에 대중들의 호응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때 프로이트의 우군이 예상치 못한 곳인 미국에서 나타났다. 미국의 초기 심리학자 홀(Stanley Hall)이 정신분석을 미국에 소개한 것이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표현했던 홀은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성에 대해 평소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러던 중 프로이트의 이론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09년에 자신이 총장으로 있던 클라크대학 창립 20주년 기념 강연에 프로이트를 초청했다. 이 강연 이후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유럽보다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미국에서 많은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을 지지자로 얻을 수 있었다.
프로이트가 유럽에서 전문가보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미국에서 대중들보다 전문가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용어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이론을 전개할 때 의도적으로 일상어를 썼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전문용어(라틴어)로 둔갑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필요했던 의사들은 프로이트의 표현이 자신들의 전문성과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나머지, 일상어를 모두 전문용어로 바꿔서 번역했다. 번역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프로이트의 비엔나 의과대학 후배이자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던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이었다. 그는 『프로이트와 인간의 영혼(Freud and Man’s Soul)』에서 잘못된 번역이 정신분석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정신분석의 수정과 발전
프로이트는 처음에 무의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추동을 성적인 것으로만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이란 섹스 행위(sexual intercourse) 이상의 의미다. 그래서 성적 추동을 다른 말로는 에로스(Eros), 즉 삶의 추동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기본 추동에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된다. 공격적 추동이 그것이다. 무조건 죽이고 파괴하는 전쟁을 성적 추동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성적 추동이 삶의 추동이듯이 공격적 추동은 죽음의 추동, 즉 타나토스(Thanatos)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공격적 추동과 성적 추동이 동전의 양면(양가감정 참조)과 같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론에서 공격적 추동에 대한 논의를 더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정신분석의 세력이 커져가고 이론이 확장되어 가면서 프로이트는 더 많은 사례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프로이트는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 전의식으로만 구분하고 있는 지형학적 모형에 한계를 느꼈다. 원래 무의식이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마음인데, 어떤 환자들의 경우 무의식이 너무 쉽게 의식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로이트는 1923년에 『자아와 원초아(Ego and Id)』에서 구조 모형을 제안했다. 인간의 마음을 원초아와 자아(자아심리학 참조), 초자아로 설명하는 모형은 기존 지형학적 모형의 폐기가 아닌 수정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프로이트의 관심은 지형학적 모형에서는 무의식, 구조 모형에서는 원초아였다. 그렇지만 그는 점차 무의식과 원초아를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자아임을 인식했고, 정신분석의 관심은 원초아에서 자아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방향 선회는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완성했다. 많이 알려진 자아의 방어 기제역시 프로이트의 생각을 안나가 발전시켜 정리한 것이다.
정신분석의 비판과 관심
정신분석이 많은 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는 현대 과학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의 기준은 과학철학자 포퍼(Karl Popper)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다. 반대 증거로 기각이 가능한 명제를 세울 수 있어야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신분석은 핵심 개념인 무의식의 특성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하다. 무의식은 비합리적, 비논리적, 역설적, 모순적이다. 따라서 상반되는 증거가 하나의 현상을 지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일례로 무의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신분석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 모두 정신분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이러한 면이 있지만, 논리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과학과는 맞지 않는다. 실제로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공산주의는 과학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현대 심리학과 과학에서 홀대받는 것과 달리 철학이나 문학, 예술 분야에서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게다가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과 용어들은 현대인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일상어처럼 쓰인다. 이는 프로이트가 가장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던 베텔하임은 정신분석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따뜻한 이론이며, 프로이트는 진정한 인간주의자라고 주장했다. 따지고 보면 정신분석은 최초의 심리치료 이론이다. 프로이트 이전까지는 정신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이론 이후로 수많은 심리치료 이론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이론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발전, 수정시킨 것들이거나 혹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들이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 생전이나 사후에 많은 비판과 관심을 동시에 받고 있다. 앞으로도 식지 않을 감자가 될 듯하다. 정신분석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정확한 이해 없는 비판과 관심은 모두 배척해야 한다. 적어도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이해하려면 ‘그에 대해서 쓴 글’이 아니라 ‘그가 쓴 글’을 읽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19~20세기의 ‘그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