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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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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45회 작성일 22-10-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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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무대이며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이다. 그들은 각자의 배역에 쫓아서 등장했다가는 퇴장하지만 사람은 한평생 동안 여러 가지 역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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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말이다. 이 말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현실에 적용하려고 애썼던 학자가 있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1922~1982)이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가리켜 흔히 '연극학적 이론'이라고 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고프먼은 "20세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 60년 동안 미시적 차원의 최고 이론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미시적 분석'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에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고프먼이 역설했던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 개념은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날카로운 안목을 제공해준다. 그 어느 나라보다 대인관계(對人關係)가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 고프먼은 뒤늦게라도 각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학자임이 틀림없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 우리, 특히 사회적 공인(公人)들이 펼치는 연극은 진짜 연극보다 훨씬 계산적이거니와 음흉하기까지 하다. 어디까지가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연기(演技)고 어디서부터는 인정할 수 없는 연기(위선과 기만)인지, 이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도 고프먼은 다시 불러내야 할 사회학자가 아닐까?

고프먼의 대표작은 1959년에 출간된 『일상생활에서의 자아 표현(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이다. 고프먼은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Robert E. Park, 1864~1944)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person)이라는 단어가 그 첫 번째의 의미로서 가면(mask)이라는 뜻을 지녔음은 결코 단순한 역사적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다소 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인식일 것이다.……이러한 역할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아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역할들 속에서이다."

고프먼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가면(social mask)' 연구에 몰두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커뮤니케이션이란 곧 상황 조작에 의한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제외한다면, 고프먼만큼 자아에 대해 그렇게 깊이 탐구한 사람이 또 있겠는가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가면'이란 게 뭔가? 우선 아주 쉽게 접근해보자. 야구 심판을 유심히 관찰해보자. 야구 심판은 투수가 던진 공, 특히 스트라이크에 대한 판정을 아주 큰 소리로 그것도 극적인 제스처를 섞어가면서 내려주기 때문에 야구 보는 재미를 더하게 해준다. 그런데 그게 단지 재미를 위해서만 그렇게 하는 걸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투수가 던진 공에 대해 매번 순간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하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코 쉽지 않다. 투수가 시속 150킬로미터의 공을 던지는 경우 투수 플레이트에서 홈 플레이트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0.35초에 불과하다. 이는 심장이 한 번 박동하는 평균 시간에 해당한다. 타자가 근육을 움직여 방망이를 휘두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0.25초다. 결국 타자의 두뇌는 약 0.1초 사이에 방망이를 휘둘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정이 그와 같은바, 심판으로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주저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하면 큰일 난다. 판정의 권위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일수록 더욱 큰 소리로 더욱 극적인 제스처를 섞어가면서 판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즉, '인상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게 바로 고프먼의 관찰 결과다.

고프먼의 이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바로 마케팅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고프먼의 이론을 서비스 업무는 물론 인간 체험의 상품화 분야에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일부 마케팅 교수들은 서비스와 체험의 마케팅은 근본적으로 연극이라면서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무대 위의 배우가 신빙성 있는 공연을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요인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서비스 분야의 '배우'도 관객에게 감동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세심한 연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스웨스턴대학, 컬럼비아대학 등과 같은 미국 명문 대학들의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에선 연기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전문 배우와 감독으로 짜인 강사진은 최고경영자들에게 집중적인 역할극 훈련을 시킨다. 그런가 하면 일부 영국 의학자들은 의사들도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연기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며, 의과대학 수업에 연기 과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프먼이 말한 '인상 관리'는 개인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인상과 자신의 아내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인상은 전혀 다를 것이다.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인상을 보여야 할 필요성은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것이다. 조종혁은 사회인들은 한 상황에서 연기(演技)를 다른 상황의 청중들에게는 보이려 하지 않으며 사회인들의 연기는 청중 관리의 필요성을 느낀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역할 수행의 일관성 유지에 관한 문제이다. 상이한 상황, 상이한 청중들에게 각각 이상적인 연기를 제공하는 것은 자칫 여러 명의 '나', 인상 관리의 비일관성이라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인들은 한 상황에서의 연기를 다른 상황에서의 청중들에게는 보이려 하지 않는다. 행위자가 만약 이러한 인상 관리의 원칙에 실패한다면 그의 사회적 정체성은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직장과 가정은 동일한 무대 연기의 장이 될 수 없다. 술친구와의 연기가 직장의 상관에 대한 연기와는 같지 않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자신의 표현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코미디언이 자신의 프로그램이 아닌 상황에서 기자의 인터뷰에 응했을 때 별안간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 역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표현 통제의 원칙을 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상을 당한 절친한 친구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평소와 마찬가지의 농담이나 음담패설을 시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권위의 유지엔 '인상 관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행여 우습게 보일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자신의 권위를 행사해야 할 대상과 먼 거리를 두고 가급적 신비하게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특히 전문직 종사자에게 필수적이다.

"판사의 권위는 그의 역할 수행(무대 연기) 못지않게 신비화에 기초한다.……법률 용어의 어려움은 일반인들의 의미 공유를 차단함으로써 법정의 신비화(권위)를 강화한다. 환자들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의사들의 글씨는 그들만의 상징 세계, 그들의 권위를 보호한다."

남녀 관계에서 이 가면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프먼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여대생들의 예를 자주 드는데, 아마도 자신의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내숭'이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발달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고프먼은 한 대학 기숙사에서 여학생들의 행태를 관찰했다. 남학생에게서 전화가 오면 사무실에서 복도의 스피커를 통해 학생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자주 불리는 게 여학생이 누리는 인기의 척도가 된다. 그래서 여학생들은 자신의 이름이 여러 차례 호명될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또 고프먼은 "종종 미국의 대학교 여학생들은 데이트할 만한 남학생 앞에 있을 때, 자신들의 지성과 재능, 결단력 등을 낮추어 보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사람들한테서 경솔하다는 평을 받는 데도 불구하고, 정신수양이 깊은 듯이 자기들을 보여주고자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남자 친구들이 지겹게 설명할 때 참고 들어주는 공연자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수학이 서투른 애인들 앞에서는 수학을 더 잘할 수 있음을 숨기기도 하고, 탁구 경기에서는 끝나기 직전에 져주기도 한다. 때때로 긴 단어의 철자를 틀리게 쓰는 것은 가장 멋진 기교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내 남자 친구는 굉장한 쾌감을 느끼고서 답장을 보내주게 된다. '얘, 넌 정말로 철자도 잘 모르는구나!' 이런 모든 것을 통해 남자의 자연스러운 우월성이 과시되어지고 여성의 약한 역할이 확인된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선 여자들의 이런 내숭이 종종 이야깃거리가 되면서 그걸 까발리는 걸 재미의 포인트로 삼고 있지만, 실제 세계에선 '내숭 까발리기'는 위험한 일일 수 있다.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말이다. 사실 고프먼의 이론은 프라이버시 보호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사생활의 공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활동을 위해 쓰고 있는 가면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가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법학과 교수 제프리 로즌(Jeffrey Rosen)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고프먼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수인 나는 학생들을 대할 때, 동네 세탁소 주인을 대할 때 각각 다른 사회적 가면을 이용한다. 만약 이 가면들을 모두 강제로 벗겨버린다면 남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방어 능력을 잃어버린 상처 입은 인간일 것이다. 고프먼은 또한 사람들이 무대에 서는 배우들처럼 무대 뒤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버리고 추잡한 농담을 지껄이기도 하면서 사회생활의 불가피한 일부인 긴장을 털어낸다. 그러나 끊임없이 정보가 교환되는 인터넷 경제 속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은 계속되는 감시 속에서 일을 해야 하는 환경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끌려들어가고 있다."

요컨대, 고프먼은 모든 상황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인성' 혹은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자아'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 상황에서 역할 연기를 하는 다양한 모습의 조합된 성격(ensemble character)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를 각 상황에서 단지 투사된 이미지로서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서 파악하는 고프먼의 견해는 극단적이고 상황적인 것으로서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가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 할 또 다른 이유라고 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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