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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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551회 작성일 22-11-17 16:05본문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한 종합상사를 배경으로 한 인기 웹툰을 보면 위와 같은 같은 퇴직자의 말이 나온다. 인터넷이나 SNS에서 회사원들은 말한다. “월급이 마약”이라고. 일이 힘들고, 미래가 잘 보이지 않아 근무하던 회사를 그만두려는 마음이 굴뚝같아도 막상 월급을 받으면 또 어떻게 한 달을 지내려는 마음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적은 돈이지만, 예측 가능한 삶이 주는 ‘안정감’은 퇴직을 막을 만큼 매력적이다.
안정감이 이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퇴직의 후유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막상 직장 밖으로 나가면 직장이라는 조직의 울타리 안에 있었던 것과는 다른 녹록치 않은 삶을 만나게 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생존의 문제다. 경제적으로 잘 준비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존의 문제를 고민한다. 퇴직자들의 상당수는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의 삶으로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는 경우가 많다. 자영업의 길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꿈꾸는 것처럼 성공한 ‘사장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몇 번의 부침과 실패를 겪으면서 퇴직금을 소진하고 나면, 이러한 생존의 문제는 더욱 절박해진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선 기분이 드는 것이다.
퇴직자들의 엄청난 상실감과 우울
퇴직은 비단 생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스트레스다. 직장을 잃는 것은 곧 개인에게는 사회적 실존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직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잃는 것이고, 가족 내에서는 부양자의 역할을 잃는 것이고, 직장 내에서의 인간관계를 잃는 것이다. 이러한 상실만으로도 개인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스트레스와 부담을 줄 수 있다.
생각해보라. 어제까지만 해도 잘 보이려고 노력하던 부하들이 퇴직을 앞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제까지 쓰나미처럼 밀려오던 업무 관련 요청사항 등의 이메일이 썰물 빠지듯 사라지면서 자신의 존재감은 한없이 약해진다. 막상 퇴직을 하고 나면 갑자기 출근할 곳이 없어지면서, 재직 시절엔 24시간을 쪼개어도 모자라던 시간들이 이젠 어떻게 보내야 할 지를 몰라 주체할 수가 없다. 축사, 격려사를 보내달라고 하는 곳도 없다. 이러니 퇴직자들이 우울증을 겪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퇴직에 의한 상실감은 직장을 자신과 한 몸으로 생각하고 헌신하며 오랜 세월 근무한 사람, 겉으로 보이는 직위나 자기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돈을 쓰거나 부하 직원들을 부렸던 사람일수록 클 수 있다.
퇴직은 개인의 손실만이 아닌 사회적 손실
퇴직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 가족에게도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기고, 가정에서도 다양한 심리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퇴직 등으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은 특히, 가족 내에서 잘 전이된다는 연구결과들이 많다. 일례로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 심리학과 제럴드 헤펠·제니퍼 헤임스 교수 연구팀이 기숙사 룸메이트 103쌍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룸메이트 한 명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다른 룸메이트도 이러한 생각을 따라 해 6개월 사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특히 퇴직은 남편과 가까운 아내에게 미치는 후유증이 크다. 일본에서는 ‘은퇴남편증후군(RHS: Retired Husband Syndrome)’이라는 용어까지 있을 정도다. 이 증후군은 남편의 은퇴와 함께 함께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지면서, 몸이 자주 아프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증상을 말한다.
퇴직으로 인한 개인의 상실은 가족의 상실을 넘어 사회적 상실로도 번져간다. 퇴직자의 우울증은 ‘충동적 자살’의 한 원인으로 거론되며,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직장인으로 훌륭하게 살아온 이 사회의 수많은 가장들의 퇴직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미국의 극작가인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란 희곡을 통해 직장을 잃은 아버지의 비극을 다루기도 했다.
그렇기에 퇴직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이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공지영 작가는 ‘의자놀이’라는 책에서 정리해고를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를 놓고 빙글빙글 돌다 누군가 외치는 구령 소리에 의자를 먼저 차지해야 하는 ‘의자놀이’에 비유하며,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에게 뜨거운 손을 내밀자고 했다. 의자를 뺏긴 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퇴직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우리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퇴직자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까? 우선 이러한 정리해고나 퇴직을 최소화해야 한다. 있는 일자리는 상생을 위해 나누고, 해고나 퇴직 후 생존기반을 잃더라도 그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고자, 퇴직자들의 가족 구성원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