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웠어요 정신질환자의 아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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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610회 작성일 22-10-27 09:46본문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난 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결혼 당시 이미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었으니, 쉽게 말해 25년간 정신장애자의 아내로 살아온 것이다.
남편의 병증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고등학교 재학시절이라고 했다. 1960년 당시 명문이었던 경기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남편은 그야말로 미래가 기대되는 전도유망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무너졌으니 그도 가족도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당시 가족들은 남편의 병이 정신질환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아마 알아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지금보다 더욱 끔찍해서 병을 인정하기도, 병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대놓고 치료하기도 쉽지 않았다.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적십자병원에서였다. 그 때 그는 장장 27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대여섯 곳의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차였다. 치료를 마친 그가 퇴원한 후 우리는 한 집에서 부부로 살게 되었다.
힘들 것이라는 각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와의 생활은 생각보다 벅찼다. 병원을 들락거리던 그는 바깥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갑자기 “밖에 데모를 하고 있으니 나갈 수 없다”며 외출을 거부하기도 하고, 환청에 시달리며 이해 못할 소리로 떠들다가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매일같이 한 주먹이나 되는 약을 하루 세 번 먹어야 하는 중증환자였다. 그럼에도 담배는 매일 족히 대여섯갑씩은 피워댔으며, 탄산음료를 입에 달고 살았다. 당연히 몸이 건강할 리 없었다. 몸이 힘들 땐 어디 눕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눕는 것 자체를 참아내지 못했기에 낮에 의자에 앉아 조는 것으로 잠을 대신하고, 밤에는 온 집안을 돌아다니거나 창문을 열고 노래하거나 큰 소리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전쟁같은 밤을 보내고 나면 그도 나도 기진맥진이었다. 몸을 씻는 것, 손발톱을 정리하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다. 누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순간적으로 폭발해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드는 통에 머리를 감거나 깎는 일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몸으로 흘러들어가는 많은 약 때문에 뻣뻣해진 몸, 잠을 자지 못해 퀭하고 피곤한 안색, 지저분하고 부스스한 몰골, 오랫동안 깎지 않아서 피딱지가 맺힌 긴 손발톱... 누가 봐도 남편은 정신질환자임을 알 수 있는 외관이었다.
1996년 7월 말경, 남편은 기어이 당뇨로 오른쪽 다리를 종아리까지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정신장애에 더해 지체장애까지 안고 살아야 하다니... 더구나 여러 번 수술실에 들어가야 하는 대수술이라고 했다.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를 붙잡고 수없이 수술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는 다리를 자르는 건 상이용사들만 한다는 동문서답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남들은 이런 내게 남편의 질병을 알면서도 왜 결혼했느냐고 묻는다. 지레짐작으로 돈을 보고 결혼했거나 혹은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거라 쑥덕거리기도 한다. 남편을 열렬하게 사랑해서 결혼했느냐고 물으면 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가족으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냐고 물으면 그렇다. 나는 남편에게서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꼈고, 그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해서 지금까지 부부로서 애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남편을 더욱 세상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다. 이제, 70대가 된 내 남편은 누가 봐도 근사한 노신사다.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어색하지만 상황에 맞게 행동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편견 속에서 내 남편은 그저 ‘정신병자’일 뿐이다.
정신병자. 내가 남편과 살면서 가장 듣기 싫고 괴로웠던 말은 ‘정신병자’였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얼마나 증상이 나아졌는지도 관계없이, 상대에 대한 작은 존중도 없이 몰아붙이는 그 말, 정신병자. 주변 사람들은 물론 방송 매체에서도 너무도 쉽게 그 단어가 튀어나왔다. 때론 그 단어가 영원히 남을 낙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암도 고치는 현대의학에서 정신질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다. 다른 질병처럼 조기에 발견해 적절히 치료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병이다. 당뇨병이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처럼 정신질환 역시 오랜 시간 치료하고 평생 동안 약을 먹으며 증상을 관리하면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은 정신질환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너무 가혹한 환경을 만들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복지가 엉망인 우리나라에서는 가족만이 그들의 유일한 안전망이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자 가족들이 사회와 국가의 도움 없이 환자의 인생을 책임지고, 치료비를 부담하고, 간호하며, 재활을 돕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간다. 하지만 사회와 이웃들 사이에서 그들은 정신질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또 죄인이 되어야 한다. 그 무서운 편견들 때문에 당당하게 나서서 정신질환자를 위한 복지 정책이나 사회안전망 구축을 요구하고 싶어도 그 매서운 편견과 싸울 일이 아득해서 우리는 또 입을 다물고 만다.
정신질환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잠복해 있다가 생기는 '괴질'과 같은 질병이 아니다. 몸의 어느 부분이 여러 이유로 자칫 고장나서 생기는 다른 질병들과 똑같다. 다만 그 부위가 콩팥이나 심장, 혈관이 아니라 뇌의 한 부분이라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약물치료 등의 여러 치료로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러니 이들을 그냥 여느 환자들처럼 대해주었으면 한다. 동정도 말고, 우대도 말고, 그냥 '똑같이' 말이다.
누군가는 현대인들이 가장 가까이해야 할 치료시설은 신경정신과라고 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가장 다치기 쉬운 것인 신경정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본인이나 가족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면 매우 거북해 한다. 주변의 시선도 그 거북함을 키우는데 한몫한다. 친구나 동료가 스트레스에 싸여 괴로워하거나 우울증을 염려하면 신경정신과에 가보라고 권하면서도 막상 갔다 왔다고 하면 대번에 보는 눈이 달라지고 뒤에서 수군거리기 일쑤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편견이 없어져야,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신경정신과 치료를 충분히 받고 사회가 더 건강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병이든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빨리 낳는다. 또 많은 이들이 열심히 치료하려 할수록 치료방법도 발전하지 않을까.
덧붙여 얘기하면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복지정책도 보다 많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남편과 같은 중증 정신질환자나 그 가족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경우 남편이 1급 장애 판정을 받았음에도 작은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제도상의 허점들이 너무나 많다.
나뿐만 아니라 중증 정신질환자의 아내는 남편을 24시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어 생활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 중증 정신질환자 가족들을 위해 약값 지원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저 생계비 수준의 지원이 하루 속히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신질환 장애인의 재활 취업을 위한 환경도 절실하다. 정신병의 치료는 적절한 약물치료와 정신재활을 병행하면 훨씬 효율적이다. 정신재활은 정신장애인의 취직 기회 제공과 작업 보장이 뒷받침 될 때 비로소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족을 대신해서 중증 환자를 돌봐줄 수 있는 제대로 된 치료기관이 만들어 지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우리 남편이 그러했듯이, 정신질환은 오랫동안 시설에 입원해 있을수록 악화되고 만성화되어 결국에는 '불치의 병'처럼 되고 만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짐을 가족에게만 모두 떠맡기고 있는 형편이다. 돌봐줄 수 있는 가족이 살아있을 땐 그래도 다행이다. 만약 돌봐주는 가족이 환자보다 먼저 죽는다면, 환자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치료기관이 없다. 오죽하면 많은 환자 가족들이 환자가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눈물로 기도할까. 이런 아픈 기도가 더는 이어지지 않도록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