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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늪에서 나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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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520회 작성일 22-11-1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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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내리막길 위를 달리는 버스에 홀로 올라타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 위태로운 버스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서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고, 홀로 빠져 나오려 몸부림을 쳐도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고장난 버스는 나를 싣고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지면서 아래로 아래로 달렸고, 나는 기어이 버스와 함께 늪에 내팽개쳐졌다.

난 여자라기보다는 그저 한 아이의 엄마로서만 살아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로 인해 세상에 태어난 내 아이를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노라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일을 하다 갑작스레 장애를 얻게 된 것이다.

한번 시작된 불행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망가지고 부셔져버린 생 앞에 남겨진 것이라곤 어깨를 짓누르는 빚덩이였고, 남편의 언어폭력은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무엇보다 날 괴롭혔던 건, 고장나고 녹슬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쓸모없는 기계처럼, 나란 존재가 귀한 내 아이에게 앞으로 쓸모없는 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넘기고,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자살, 죽음, 우울’이라는 단어가 친근하게 들렸고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내 이십여 년의 시간이 억울해 통곡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남 몰래 자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살 도구들을 모으고, 죽을 장소를 찾아 다니기도 했다. 죽음이 바로 옆에 와 있는 것 마냥 가깝게 느껴졌다.

자살의 유혹 속에서 그래도 구원의 끈이 되어 준 것은 아들의 존재였다. 좌절해 있는 나를 붙잡고 “엄마가 응가를 싸고 기어 다녀도 엄마만 내 곁에 있으면 돼.”라고 말하는 아들을 보며 그래도 살아가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죽는다면, 불쌍하고 가엾은 내 아이는 어떻게 하나. 아이의 마음에 평생 남을 그 상처는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고 잠든 아이의 얼굴을 쓸며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 혼자 힘만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어렵게 용기를 내어 ‘서대문구 정신보건센터’를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막상 입구에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돌아서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불안하지만,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가는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늦게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도만으로도 배신감과 충격에 죽을 듯 힘들었는데, 남편의 악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폭언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남편의 상간녀는 나에게 직접 전화해서 ‘죽이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억울함과 분통함에 피가 타 들어가는 듯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서 죽어 보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때마다 아이를 생각하며 이를 사리물었다. 나마저 떠나면 아이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괴로움에 지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어떻게든 이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절박하게 서대문구 정신보건센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가는 순간까지 망설임과 후회가 일었지만, 막상 상냥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툭하고 긴장이 풀어졌다. 나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울면서 내 이야기를 쏟아냈다. 앞뒤도 없이 그저 쏟아져 나온 내 넋두리에 당시 상담사였던 간호사는 따뜻하게 귀를 기울여주었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녀는 만남을 청해왔다.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고 나니 또 망설임이 찾아왔지만, 용기를 내서 결국 상담까지 받았다. 상담 결과는 치료를 요하는 고도의 우울증이었다.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놈의 돈이 문제였다. 병원 치료는커녕 약 한 알 맘편히 사 먹을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담한 것이 되려 후회가 되었다. 그냥 모른 채 그렇게 살 것을...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절망스러웠다. 그 때문인지 자살 충동은 더욱 강해졌고 마치 벼랑 끝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때 뜻밖의 도움이 내게 주어졌다.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상담 간호사가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준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그녀는 동사무소와 구청사회복지과에 연락해서 어려운 생계에 대해서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러고도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그녀는 매일같이 전화를 하고, 때론 집으로 찾아와 나를 위로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녀의 노력으로 나는 조금씩 희망을 향해,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 때의 감사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정말이지 엎드려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한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나는 자살의 유혹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 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한결 강인한 사람이 되었다. 치료 기간 동안 진료실 문 앞까지 나와 환히 웃으며 나를 맡아준 원장님, 전화로 안부를 챙기고 내 상태에 대해 늘 신경을 써주는 간호사님, 나를 이끌어준 상담사님. 그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힘을 낸다. 이 몸짓, 이 웃음이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전히 하루하루는 힘겹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남편의 폭력과 외도, 나의 장애, 가난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고 해초처럼 발에 감기어 있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비참해진 것일까 생각하면 괴로움은 파도처럼 거세고 흉폭하게 가슴을 덮쳐온다. 그래도 다시 이를 꼭 물고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 힘을 낸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치료를 받으며 깨우친 것은 내게 해를 끼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우울증에 대해 쉽게 이야기한다. 잠시 스쳐가는 ‘마음의 감기’ 같은 것이라고. 그러나 우울증으로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의 깊이를 모른다. 감기에 걸렸다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꼭 이야기하고 싶다. 적극적으로 치료하라고. 감기처럼 절로 낫는 병이 아니니 치료를 받고 온 힘을 다해 떨쳐내려고 노력하라고.

비록 찰나에 불과한 삶일지언정, 앞으로 나는 부끄럼 없이 살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서대문구 정신보건센터에 근무하시는 간호사님, 복지사님, 의사선생님,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내게 처음 손을 내밀어준 간호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도움을 받고 절망을 이겨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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