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기록에 남는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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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13회 작성일 22-11-02 10:54본문
정신과는 독특하다. 내과나 소아과 의사들은 길에서 환자를 만나면 “원장님, 더 젊어지셨습니다”라든가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정신과 의사들은 그렇지 않다. 어쩌다가 환자에게 인사를 받더라도 별로 내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의사가 먼저 환자를 아는 척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언뜻 생각하면 정신과 의사들은 차갑다거나, 인간미가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한 단계 깊이 생각해보면 정신과의 특성상 당연한 일이다. 이는 ‘환자의 비밀 보장(confidentiality)’을 생명으로 하는 과의 특수성 때문이다.
내과나 다른 과에서 환자를 치료하다가 잘 낫지 않을 때, 혹은 정신적 이유를 의심하여 정신과에 가 보라고 하면 “정신과를 왜 가요? 내가 미쳤어요?”라며 펄펄 뛰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마지못해 정신과를 방문한 사람들도 혹시 자신이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전전긍긍해 한다.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정신과 하면 정신병을 떠올리고, 정신병하면 치료가 어려운 골칫거리 병이라는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리적 부담을 갖고 내원하는 아픈 환자들을 대하며, 항상 조심스럽게 환자를 봐야만 했던 독특한 과가 바로 정신과다.
정신과에 대한 몇 가지 편견들
환자들이 정신과에 올 때 부담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기록에 남는다’라는 편견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수십 가지의 경우가 있다.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 처방을 받으러 갈 수도 있고, 스트레스 상담을 받으러 갈 수도 있다. 심한 경우 망상이나 환청 때문에 입원하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과 치료’라는 말에는 이와 같은 다양한 사정과 맥락들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소위 정신병이라 생각하는 정신증(psychosis)을 연상시켜 정신과에 대한 긴장과 불편함을 더해줄 뿐이다.
‘기록에 남는다’라는 말은 더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의사가 차트에 기록한다는 얘기인지, 정신과에 간 사실을 누군가 모니터링 해서 불이익을 준다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과 자체가 무슨 이상한 기록을 한다는 건지 모호하게 뒤섞여 있으며,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씁쓸한 느낌마저 준다.
‘정신과약을 먹으면 보험 가입에 지장이 있다’는 잘못된 인식도 환자들의 정신과 문턱을 높이는 하나의 예다. 우선 ‘정신과 약’은 전문 의사도 모르는 모호한 표현이다. 정신과에서 처방하는 모든 약이 정신과약인가? 정신과 처방약 중 향정신성의약품만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정신증를 치료하는 약물인 항정신병약물을 지칭하는 걸까?
전문 의사도 모르는 불명의 ‘정신과약’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보험가입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없으면 말고), 공무원 임용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식의(없으면 말고) 모호한 표현으로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풍조다.
만약 보험회사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홈페이지(www.onmaum.com)의 ‘보험 가입 거절시 대처 요령’ 을 참고해서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는 인권위원회, 보험소비자연맹, 금융인권위원회에 고발까지도 할 수 있는 매우 불합리한 처사임이 분명하다.
정신과에 대한 잘못된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들
이와 같은 정신과에 대한 그릇된 편견들은 사람들이 정신과에 내원하는 것 자체를 ‘낙인(烙印)찍는다’. 낙인은 과거 형벌로 죄인의 몸에 도장을 찍는 것을 일컫는 말로, ‘낙인찍는다’는 말에는 다시 씻기 어려운 불명예스럽고 모욕적인 판정을 내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상대방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릇된 편견을 갖는 것, 그것은 죄악이요 범죄다. 이 낙인은 한번 찍히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고 남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소외감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정신과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어져 오고 있다. 2011년 8월에는 신경정신과가 정신건강의학과로 개명됐다. 그 배경은 과거 잘못된 풍토 속에 잔존하는 정신과에 대한 불편감, 거부감을 없애고 긍정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일으켜 대한민국의 정신건강을 드높이자는 취지에서다.
또한 2013년 4월에는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상담만 받는 경우, 청구기록마저 남지 않도록 제도가 개선되었다. 정신과 질병 상병코드인 F 코드 이외에 ‘정신과 상담’만 받는 사람들에 한하여 일반상담 청구 코드인 Z 코드를 개발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정신과 상담만을 원하는 이들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정신과를 방문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보건복지부는 정신질환의 범위를 축소하고 정신질환 이력에 따른 차별 방지를 위한 보호조항 신설을 주요 내용으로 한 정신보건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있다. 게다가 학교폭력, 성폭력,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편히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도 보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긍정적 풍토를 조성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정신건강 증진에 일조할 것이다.
이제는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없어져야 할 때
그동안 정신과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을 가려주는 말이 바로 ‘신경’이었다. ‘신경정신과’는 정신과보다 어감이 좋고, ‘신경과’ 혹은 ‘정신신경과’로 용어를 바꿔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신경정신과가 정신건강의학과로 개명된 이후로, ‘신경정신과’라는 남들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가려주는 심리적인 ‘방패’가 사라졌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요즘 정신건강의학과는 일반인들이 소위 정신병이라 생각하는 정신증(Psychosis)보다는 스트레스성 불안, 우울, 불면, 화병 등 신경증(Neurosis)과 관련된 질환들을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명인들도 언론매체나 방송 등을 통해 정신과 진료 사실을 밝히면서, 정신과가 예전처럼 중증 정신질환자들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더욱이 정신∙심리적 요인이 영향을 주는 각종 내과∙외과적 질환들도 점점 더 많아져 정신건강의학과의 역할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암 분야에서는 ‘정신종양학’이라는 학문의 한 갈래도 등장했다. 그만큼 현대에 들어서 정신건강의학과의 역할이 커져 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제는,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