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510회 작성일 22-09-30 15:55본문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원(社會福祉法人兄弟福祉院)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 일대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로, 3,146명이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이에 35명이 탈출함으로써 그 내부에서 일어난 인권유린이 드러나게 되었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그리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것이 형제복지원 설립의 배경이었다.[1][2][3][4]
형제복지원은 폐쇄 이후,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려졌지만, 이후 빠르게 잊혔다. 27년 뒤, 1984년 입소하여, 1987년 폐쇄당시 전원조치된 피해자인 한종선이 2012년 5월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 전규찬과의 공저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전규찬, 박래군)의 책을 통해 형제복지원에서의 실상을 글과 그림으로 증언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이 결성되었다. 2014년 3월 2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형제복지원의 진실'에서는 27년 간 감춰져 온 이 사건의 의혹과 진실이 방영되었는데, 이 복지원에서는 수용자들의 중노동은 물론 수용자들에 대한 구타와 감금 그리고 성폭행까지 자행됐으며,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5]
문무일 검찰총장은 2018년 11월 27일에 한종선씨 등 형제복지원 피해자 30여명을 만나 "검찰이 외압에 굴복해 수사를 조기에 종결하고 말았다는 과거사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무겁게 받아 들인다"고 하면서 "검찰이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였다면 형제복지원 전체의 인권침해 사실이 밝혀지고, 인권침해에 대한 적절한 후속조치도 이루어졌을 것"이라며 "피해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현재까지 유지되는 불행한 상황이 발생한 점에 대하여 마음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6]
사건 개요[편집]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7]에 위치한 <부산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목적으로 해마다 20억 원씩 국고의 지원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부산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이나 노숙자, 기차역에서 TV를 보고 있거나, 시장에서 음식을 먹던 무고한 시민 등을 부랑인으로 생각하고 아무도 모르게 무조건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여성은 강간까지 당했다.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는 죽이고 암매장까지 했다. 인원수만큼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12년 동안 무려 589명이 사망했고,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또한 원장 박인근(당시 58세)은 자신의 땅에 운전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했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8][2]
형제복지원에서 원생 생활을 하던 사람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야산에 매장된 시신이 비가 오면 쓸려 내려오는데, 진흙과 사람의 살점이 뒤섞인 것을 아이들이 뭉쳐서 '쫀득이'라고 부르고 먹으며 허기를 채우며 너무도 부족한 식사와 간식 때문에 주린 배를 채웠다는 내용도 있었다.[9] 형제복지원에 갇힌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70%가 가정이 있는 일반인이었고, 해운대에 놀러온 서울대생과 일본인도 있었다.[10]
재판[편집]
1심[편집]
- 박인근(58세 형제복지원장): 징역 10년, 벌금 6억8천178만원
- 김돈영(50세 형제복지원 총무): 징역 1년
- 성태운(48세 형제복지원 소대장): 징역 1년
- 이충렬(27세 형제복지원 소대장): 징역 3년
- 주영은(48세 형제복지원 사무장):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 임채홍(48세 형제복지원 소대장):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 박두선(30세 박인근 아들, 형제요양원 총무): 징역 3년
항소심[편집]
대구고등법원 형사2부는 특수감금죄 등 5개 죄목으로 피고인들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으나 정상을 참작하여 감경하면서 박두선에 대해 "아들로 아버지의 범법행위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가담하거나 방조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11]
- 박인근: 징역 4년
- 김돈영: 징역 1년
- 성태운: 징역 8개월
- 이충렬: 징역 1년 6개월
- 주영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 임채홍: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 박두선: 무죄
상고심[편집]
대법원 형사1부(주심 황선당)는 1988년 3월 9일에 "특수감금죄와 형법상의 정당행위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며 파기환송했다.[12]
파기환송심[편집]
대구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정용인)는 "적법한 허가를 받은 시설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강제수용은 감금죄에 해당한다"고 했다.[13]
- 박인근: 징역 3년
- 김돈영: 징역 1년
재상고심[편집]
대법원 형사1부(주심 배만운)은 1989년 7월 13일 "울주사업장에 수용 중인 부랑인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취침시간에 자물쇠로 철문을 잠그고 행동의 제한을 한 것은 사회복지사업 등 법령에 따른 정당한 직무로서 감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박인근에게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횡령죄만 적용하여 징역 2년 6개월, 김돈영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14]
비상상고[편집]
문무일 검찰총장은 2018년 11월 20일 형제복지원장의 특수감금죄 등에 무죄를 선고한 기존 법원 판결에 대해 당시 형제복지원이 부랑자 등을 강제수용한 근거가 됐던 1985년 ‘내무부 훈령 410호’[15]이 △법률의 위임을 받지 않은 훈령이면서 △부랑인의 개념이 지극히 모호하여 명확성의 원칙에 반할 뿐만 아니라 △수용자들의 신체의 자유 및 거주 이전의 자유를 명백히 침해하여 과잉금지원칙에 위반되고 신체의 자유를 법에 근거하지 않고 침해하여 적법절차원칙에 반하는 것이어서 ‘법령 위반’이라 판단하여 대한민국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했다.[16]
사건 결과[편집]
1987년 당시 중요 사건은 법무부 장관까지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청와대까지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17] 이 사건 담당 검사는 김용원이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과 직원 주영은(당시 48세) 등 5명이 구속되었다.[18][8][2]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 진행 과정에서 낙후된 대한민국 내 복지시설의 수준과 참상을 보여줬다. 이후 <부산 형제복지원>은 없어지고 그 지역에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19] 사건을 수사하던 김용원 검사는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이었던 박희태에게 사건 축소 및 외압 등의 지시를 받았다.[20] 원장 박인근은 횡령죄 등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 불법구금, 폭행, 살인 등에 대해서는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원장이 횡령한 국고보조금이 12억 원에 이르지만 검찰은 7억에 대해서만 기소하였다. 그는 항소심을 거쳐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21]
2005년부터 100억원이 넘는 돈을 사회복지재단 명의로 대출 받아 18억 이상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 것이 검찰에서 확인이 되어 박인근 원장과 그의 아들은 2014년 재판을 받는다.[15]
폐쇄 이후[편집]
형제복지원 폐쇄 이후 수용자(需用者)들은 노숙자가 되고, 채혈(採血) 후 헌혈차에서 주는 빵으로 생활한 이도 있었다. 당시 12~15세의 소년과 소녀도 많았는데, 너무 오래 갇힌 채 피동적인 삶을 살아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인근은 출소 후 형제복지원 부지를 매각하고 기존에 형제복지원을 재인수하여 1000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21] 형제복지원은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똑같이 존재하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곰내길 483(달산리 985-2)에 시설을 세웠다. 박인근의 셋째 아들은 이 재단에 대표로 있으면서 실로암의 집을 운영하였으며, 2016년 이후 현재 운영하지 않는다.
27년 뒤, 1984년 입소하여, 1987년 6월 30일 형제복지원 폐쇄당시[22] 전원조치된 피해자인 한종선이 2012년 5월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 전규찬과의 공저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지음)의 책을 통해 형제복지원에서의 실상을 글과 그림으로 증언하며 그 진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편 한종선 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2013년 12월 24일 국가를 상대로 인권침해에 대한 진상 조사와 배상을 요구했다. 결국 2018년 10월 비상상고 결정이 내려졌다[23]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박인근 원장은 1981년 4월 20일 보건부 국민포장을 받았고, 1984년 5월 11일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나, 2018년 7월 10일 행정안전부는 '부적절한 서훈 취소(안)'을 심의·의결해 서훈을 취소했다.[24] 2018년 10월 현재 검찰위는 이 사건에 비상상고 권고를 내린 상태다.
형제 육아원[편집]
형제복지원의 전신으로 세워져 학교를 통학하는 실제 고아들과 돈벌이를 목적으로 끌려온 아이들을 구분해서 수용하였다.[17] 미국에서 지원해주던 후원자들이 찾아오면 하루 동안 새 옷을 입혔으며 그 하루 동안 입힌 새 옷들을 처분하다가 박인근은 구속되기도 하였다.[17] 육아 수출사업도 하며 해외 입양 가정에 감사 편지를 보내서 후원 물품을 보내 달라는 요구를 편지에서 꼭 하였다고 한다.[17]
평가[편집]
형제복지원 재판에 참여하였던 한 대법원 법관은 불법 감금이 무죄라는 판결에 대하여 "지금 기준으로는 유죄이며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그때는 일어날 수 있었다"고 개인적인 생각을 남겼다.[17]
2015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지난해 대한민국을 충격을 빠뜨렸던 한국판 홀로코스트라고 형제복지원을 평가했다.[17]
2019년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형제지옥원이라는 자막을 넣고 최근 부활하고 있는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평가했다.[25]
한종선[편집]
한종선은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이자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이다. 1987년 폐쇄 이후 아무도 믿지 않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기 위해, 2012년 5월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중 전규찬 교수를 만나 형제복지원의 실상을 밝힌 책인 《살아남은 아이》를 발간하게 되었다. 2012년에 나온 《살아남은 아이》는 1988년에 나온 《형제복지원:생지옥의 낮과 밤》의 뒤를 잇는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2번째 책이다.
관련 서적[편집]
- 김영욱.《형제복지원:생지옥의 낮과 밤》. 청사. 1988년. ISBN 2006466001474
- 김용원. 《브레이크 없는 벤츠》. 예하. 1993년. ISBN 89-7385-718-5
- 전규찬·한종선·박래군. 《살아남은 아이》. 문주. 2012년. ISBN 978-89-967670-4-6
-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숫자가 된 사람들-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집》, 오월의봄, 2015년. ISBN 9788997889648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절멸과 갱생 사이 - 형제복지원의 사회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1년. ISBN 9788952129550
관련 연극[편집]
- 《성지에서 복지로》(극단 자갈치(채희완 연출))(1987년)[26]
-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에피소드 스튜디오(장지연 연출)/제15회 서울변방연극제 공식초청작)(2013년)[27][28]
- 《해피투게더》(이수인 연출)(2013년)[29]
- 《못찾겠다 꾀꼬리》(프로젝트 업라이트)(2018년)[30]
관련 방송[편집]
- 재구성한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