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저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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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659회 작성일 22-10-06 09:28본문
육영수 저격 사건은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진행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박정희가 경축사를 하던 도중에 청중석에 있던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쏜 총에 의해 영부인 육영수가 맞아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1] 당시 문세광의 본래 목적은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으나 박정희가 방탄 연설대 아래로 몸을 피하여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총탄을 머리에 맞은 육영수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후 뇌수술을 받았으나[2] 이날 오후 7시 경 향년 48세로 사망했다.[3]
범인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된 후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수사 결과, 문세광은 위조 여권을 이용하여 밀입국하였으며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을 범행에 사용했고,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것 등이 밝혀졌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 했으며 양국관계는 급속히 경색되었다.[4] 9월에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의 친서를 휴대하고 사과방한 이후 양국관계는 정상으로 회복되었으나[4] 대한민국 국민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시대적 배경[편집]
한일 수교[편집]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공화당을 조직하며 민정이양 후 집권을 하기 위한 밑작업을 이어나갔다. 헌법을 개정하여 직접선거와 대통령 중심제의 정부 체제를 만들고[5] 1963년 10월,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6] 박정희 정권의 주요정책 중 하나는 한일수교를 통한 외교정상화 추진이었다. 1964년 3월, 이런 방침과 졸속협상 내용이 알려지자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나 '6.3항쟁'이 발생했다. 박정희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내려 무력으로 강경진압했다.[7]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회담을 진행한 결과, 1965년 6월 22일에 한일조약이 체결되었고 국교가 정상화되었다.[8] 국회비준은 굴욕외교라며 야당이 반대하자 8월 14일, 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였다.
3선개헌과 재집권[편집]
1967년 연임에 성공함과 동시에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의석의 2/3를 넘어서자 3선개헌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전국적인 개헌반대에도[9] 불구하고 1969년 9월 14일 새벽에 3선 개헌안이 변칙 통과되며 박정희는 3선에 출마하였다.[10] 한편,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는 김대중이 선출되었다.[11] 유세기간 중 김대중은 이번에 정권교체에 실패할 경우,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실시할 것이라고[12] 주장하며 지지를 호소하였다. 김대중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하였다.[13][14] 비록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으나 김대중은 대선을 거치며 박정희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로 떠올랐다.[15]
김대중 납치 사건[편집]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자 신병치료차 방일 중이던 김대중은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김대중이 ‘한민통’을 결성하자 유신정부는 이 단체가 망명정부로 변신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였다.[16][17] 그러던 차에 도쿄에 머물던 김대중이 1973년 8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5일만에 풀려났지만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유신의 일등공신으로 승승장구하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3월에 터진 윤필용 사건으로 박정희의 신임을 잃자 만회하려 저지른 사건이었다.[18] 한국정부는 즉각적으로 관여사실을 부인했지만 일본은 현장에서 재취한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근거로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곧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19] 결국 김종필 총리가 9월에 대통령 친서를 들고 방일하며 사건이 무마되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의 반한 감정은 고조되었고 외교관계는 공세적인 일본에 반해 한국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사건의 진행[편집]
대통령 암살시도[편집]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10분경,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10시 23분경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기 시작하자 객석에 앉아 있던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20] 문세광은 첫발을 오발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으나 곧 연단을 향해 달려나가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경호실장 박종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사하였고[21] 박정희 대통령은 방탄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하여 무사하였다.
문세광과 경호원 간의 총격전으로 기념식에 참석한 합창단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이 경호원에 의해 피격되어 숨졌다.[22][23] 연단을 향해 계속 달려가던 문세광을 객석에 있던 세무 공무원 이대산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고[24] 10시 30분경에 경호원들이 현장에서 체포하였다. 피격된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현장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박정희는 나머지 기념사를 모두 읽었고 광복절 기념식은 종료되었다.[25]
육영수 사망[편집]
육영수 여사를 실은 응급차가 서울대병원에 도착한 것은 사건 발생 9분 만인 10시 32분이다. 응급실장 김진복 박사의 지휘 아래 지혈제와 산소호흡, 항-쇼크처치 등의 응급조치가 10여분 이어졌다.[25] 오전 11시경부터 신경외과 전문의 최길수[26]의 집도로 오후 4시 20분까지 뇌수술을 받았다.[27] 근처 병원과 적십자혈액원의 모든 AB형 혈액을 쏟아붓는 큰 수술이었는데, 400mL 혈액 148팩이 수혈되었다. 그러나 총알이 좌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킨[25] 탓에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도의는 사건 다음날 "꼭 살렸어야 했는데… 5mm만 비켜 갔어도…"라며 침통해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회복실에서 20분~30분 가량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육영수는 이날 오후 7시 경 향년 49세로 사망했다.[28]
장례와 유족동정[편집]
저녁 8시 10분,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이 육영수 여사의 서거를 공식 발표했다.[29] 사망 당시 병원 가족실에는 남편 박정희와 여동생 육예수, 둘째 딸 박근영, 아들 박지만이 있었다. 장녀 박근혜는 당시 프랑스에 유학 중이었는데, 대사관에서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만 받고 서둘러 탑승수속을 받던 중 공항에서 신문을 보고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서전을 통해서 그 당시 심정을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30]
육영수의 유해는 8월 15일 밤에 청와대로 이송되었으며 국민장으로 5일장을 치른 후 8월 19일에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31] 장례식을 치른 후 박근혜는 유학 후 강단에 서겠다는 꿈을 접고 영부인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당시 고교 1년생이었던 장남 박지만은 방황하며 성적이 하락하였고 이로 인해 본래 목표인 서울대 진학을 접고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고 한다.[32]
사건의 결과
한일 관계[편집]
수사결과를 토대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한일관계가 불편해졌다.[33][34] 9월 19일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며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로 한국을 다녀갔다.[33] 이후 양국관계 개선되었는데, 지난번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양국외교 관계에 있어서 공세적이었던 일본은 이 사건으로 인해 수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고조되었다.
한편 당시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양택식은 행사 책임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시장직에서 불명예 퇴임하고 말았다.
의혹과 논란[편집]
진범 논란[편집]
문세광은 선고 법정에서 육영수 여사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35] 이로 인해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수사본부 요원으로 현장 검증과 감식을 했던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도 월간 《다리》 1989년 8월호에서 의문을 제기했다.[35] 이건우는 후일 국민일보 기자 노가원에게도 진범이 문세광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36][37]
2005년 동아일보는 당시 경호관들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는 보도를 하였다.[38] SBS의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사격 실험을 통해 육영수의 암살사건에 얽힌 의혹들을 풀고자 하였다.
사건 조작[편집]
- 참고 : 아래의 내용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육영수와 문세광 1부 2005년 3월 20일 방영분" 중에 일부를 요약한 것입니다.
사건 수사와 언론 발표 시점이 뒤섞이며 사건 조작의혹이 MBC에 의해 제기되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김기춘[39]과 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김일두 중앙수사 본부장이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팀과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8월 15일 - 체포 후 중앙 정보부로 이송된 문세광이 지속적으로 묵비권 행사
- 8월 16일 - 김기춘이 수사에 투입되어 설득하자 오후 6시부터 문세광이 자백 시작
- 8월 17일 - 중앙수사 본부장 김일두가 수사 결과를 언론에 발표
하지만 김일두가 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이전 시점이자, 문세광이 자백을 시작하기도 전인 8월 16일자 조간신문에, 다음날인 8월 17일에 수사본부가 발표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이미 보도되었다.[40] 보도내용에 따르면 중앙수사 본부가 중간수사 결과를 8월 15일에 발표했다고 되어 있으나 김일두나 김기춘은 그런 발표를 사전에 한 적이 없다고 하여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