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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호 여인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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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595회 작성일 22-11-2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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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5년에 발생한 대한민국의 기록 역사상 최초의 토막살인사건.

2. 사건 내용[편집]

1965년 5월 16일 오후 4시 반 무렵, 강원도 춘성군[2] 사북면 춘천호에서 보트를 타고 화전 사이를 옮겨 다니며 나물을 캐던 처녀들이 목 잘린 여인의 몸뚱아리가 나체로 물속에 꼿꼿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하였다. 처녀들은 부리나케 마을로 돌아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왔더니, 시체 주변에서 악취가 났다. 시체를 확인만 하고 건지지 않은 채 경찰에 신고했으며, 시신을 인양해보니 참혹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신원은 춘성군 출신이며 술집 접대부로 일했던 당시 32세 이강순(李康順) 씨[3]. 머리가 잘려 있었으며 몸에도 큰 칼질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양손은 넝쿨로 묶었고, 양말만 신은 채로 양발이 새끼로 묶여져 있었으며, 그 새끼줄에 큰 돌이 매여 있었다. 몸통을 발견한지 이틀이 지나서 스웨터에 싸인 머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치정이나 원한에 의한 살인이 분명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경찰은 주변 진술을 통해 전, 현 남편 등 3명을 지목하고 전국에 공개수배하였으나, 사실 그 3명 모두 범인이 아니었다. 때문에 범죄와 관계없는 남편을 호송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진짜 진범이 검거되기 전, 남편은 형사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의 진짜 범인은 주막 주인이자 목수로 일하고 있는 당시 45세 남성 임동익(林東益)이었다.

3. 사건의 전말[편집]

1965년 1월 27일 밤, 이강순 씨는 남편 정찬명 씨[4]가 고향으로 간 사이에 거주지인 춘성군 사북면 지암리에서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하였으며, 이날 밤 춘천호 일대 날씨는 눈이 내려 밤길이 몹시 차가웠다고 한다. 이강순 씨는 20여리 떨어진 춘성군 사북면 용산리에 있는 김모 씨 집으로 이사가려다 힘이 들어 한 집에 사는 김모 씨에게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하였으며, 혼자 갔다 오는 길에 빈 지게를 지고 있던 최 모씨를 만나 같이 짐을 나르다 임동익이 있는 주막 앞에서 최 씨를 보냈으며, 이강순 씨는 임동익의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 안에는 임동익이 혼자 있었으며, 처와 딸은 조카 집 결혼식에 보냈다. 이강순 씨는 술을 자청했으며, 이 여인의 모습에 반한 임 씨와 4되를 함께 마시고 한방에 따로 누웠으니 임 씨가 이 여인을 건드리는 것이 화근이었다.

이강순 씨는 임동익의 뺨을 한 대 후려치고 방 옆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와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임동익은 이불을 들어 이강순 씨를 덮어 씌우고 식칼을 뺏은 다음, 이강순 씨와 주막을 같이 나왔다. 하지만 임동익은 이강순 씨 몰래 헛간에 있던 낫을 허리춤에 감추는데…

임동익은 이 씨와 같이 300여 m쯤 갔을 때 이 여인은 잘못했다고 도로 돌아가자 하자, 임동익은 이를 거절하고 살해 협박과 함께 이 씨를 강제로 끌고 갔다. 눈으로 덮인 춘천호 얼음장 위를 걸어갈 때, 임동익은 이 씨를 살려줄 경우 강간미수 혐의로 고발을 당할 것이 뻔하기에, 고함을 지르려는 이 씨의 목을 오른손으로 누르고 오른발로 이 씨의 두 발을 누르며 목을 졸라 죽였다.

이 씨를 살해한 임동익, 하지만 그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200여 m 떨어진 북쪽 산록에서 새끼줄과 칡덩굴을 가져왔으며, 낫으로 꽁꽁 얼어있는 호수를 깨부쉈다. 낫으로 이 씨의 코와 귀, 목을 잘라버렸으며, 이 여인의 옷을 발가벗기고 음부를 손바닥만큼이나 도려내어 물속에 버렸으며, 잘린 머리는 이 씨가 입고 있던 도꾸리샤쓰[5]에 싸서 물속에 유기하였다. 여인의 두 손을 덩굴로 묶고 두 발을 새끼로 꽁꽁 묶은 다음, 어른의 머리만한 돌을 주워와 발을 묶은 새끼줄에 달아매어 물 속에 넣었다.

시신을 유기한 다음은 깨버린 얼음장을 제자리에 덮었으며,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범행에 사용한 낫을 집으로 가져와 물에 씻었으나, 피의 흔적이 그대로 남기 때문에 부엌불에 낫을 아예 고철로 만들어 으로 바꿔 먹으면서 피의 흔적을 없앴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과 그녀를 덮은 이불마저도 춘천 장에 나가 팔아버렸다. 이렇듯 임동익은 완전범죄를 꿈꾸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덜미가 잡혔다. 대부분의 춘성군 경찰이 이 모씨의 남편을 의심하였던 반면에, 박성근 형사와 최기석 형사는 또 다른 범인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 무게를 두며, 이 여인이 살고 있던 집의 김 모씨로부터 "이 여인의 이삿짐을 날라주려 했다"라는 진술을 들으며 남편 장천명의 알리바이를 확보했다. 그리고 김승원 씨를 계속 추궁하여 이 여인의 행적을 알아낸 결과, 마지막 행적이 임동익의 주막에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하였으며 임동익의 자백을 받아내어, 이 사건은 4개월 만에 해결이 되었다.

4. 판결[편집]

살인·시체유기·횡령 등 죄목이 붙었으며, 피고인 임동익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임동익은 감옥에서 종교생활을 하며 아내와 딸에게 참회의 편지를 보냈지만, 해방 이후 최악의 흉악범죄를 저지른 살인자에게 아무런 동정도 두지 않았다.[6] 결국 임동익은 1968년 4월 23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되었다. 향년 46세.[7]# 

5. 모방범죄[편집]

살인까지 모자라 시신을 토막내는 끔찍한 토막살인 사건이 최초로 보도되면서 모방범죄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67년 6월 2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머리와 손과 발이 잘린 16~17세 소년이 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머리와 손과 발이 없어서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고, 범인을 잡지 못하여 5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구미제사건이다.

일본에서도 발생하였는데, 1967년 11월 6일 재일한국인이었던 한화의(韓和義, 당시 23세)가 조센징이라는 멸칭에 격분하여 나이트클럽 호스티스를 죽인 후 토막 내어 스미다가와(隅田川)에 버린 혐의로 구속되었다.

1967년 12월 12일 인천에서 돈 문제 시비 끝에 우발적으로 동거한 여인을 과도로 찔러 죽이고 토막내어 종이상자에 넣었으며 시체가 있는 종이 상자를 홍마루에 둔 것을 수상히 여긴 안집 주인의 신고로 우 모씨의 집에 세들고 있는 박도식(당시 35세)을 살인 혐의로 구속하였다.

6. 기타[편집]

범인 임동익은 황해도 재령군 장동면 출신으로 재령농업실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제국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오장에까지 진급했는데, 태평양 전쟁 때 남양군도 전투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1947년 월남해 충청남도 서산군 인근에서 뱃사공 일을 하며 어업에 종사하다가 목수일을 배워 생업을 삼기도 했다. 그 뒤 연평도 주재 대(對) 북한 공작대원으로 근무하다가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 6.25 전쟁 당시 제1군단 소속으로 참전했다.# 그는 수년간 여러 소속을 전전하며 전쟁에 참여했던 탓인지 평소 살인에 거리낌이 없고 난폭한 성격을 지녔다고 하며, 집념과 고집 또한 매우 강했다고 한다. 그의 전처는 6.25 전쟁 때 납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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