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초병 강간치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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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530회 작성일 22-11-25 14:16본문
1. 개요[편집]
2. 사건내용[편집]
사건의 경과가 상세히 기술된 기사.
1968년 5월 13일 새벽 0시경 노효영 병장, 박봉순 상병, 박모 일병 3인은 국방부 청사에서 초병 근무를 서고 있었다.[1] 이 3인은 0시 5분경 인근에 거주하던 윤모양이 귀가하는 것을 보고 통금시간이 지났다는 트집을 잡아 강제로 청사로 끌고 갔다. 그리고 청사 내 통제구역으로 데려간 후 노 병장과 박 상병 2인이 함께 폭행과 강간을 자행했다. 당시 윤 양은 '나에겐 약혼자가 있고 임신했으니 제발 살려달라'며 울면서 사정했으나 이들은 윤 양의 얼굴을 때리고 발을 꺾는등 잔인하게 폭행했고, 이후 윤 양은 실신했다가 새벽 2시경 박상병에 의해 끌어내져 길바닥에 팽개쳐졌다. 윤 양은 사건현장에서 300m 떨어진 약혼자의 집까지 차마 걸을수도 없어 100여 미터를 겨우 기어가다 쓰러졌을 정도로 최악의 폭력에 시달린 상태였고 윤 양의 울음소리를 들은 주민들에 의해 겨우 발견될 수 있었다.
윤 양은 이 때의 충격으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고 이후 기억력장애와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등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시달렸다.
1968년 5월 13일 새벽 0시경 노효영 병장, 박봉순 상병, 박모 일병 3인은 국방부 청사에서 초병 근무를 서고 있었다.[1] 이 3인은 0시 5분경 인근에 거주하던 윤모양이 귀가하는 것을 보고 통금시간이 지났다는 트집을 잡아 강제로 청사로 끌고 갔다. 그리고 청사 내 통제구역으로 데려간 후 노 병장과 박 상병 2인이 함께 폭행과 강간을 자행했다. 당시 윤 양은 '나에겐 약혼자가 있고 임신했으니 제발 살려달라'며 울면서 사정했으나 이들은 윤 양의 얼굴을 때리고 발을 꺾는등 잔인하게 폭행했고, 이후 윤 양은 실신했다가 새벽 2시경 박상병에 의해 끌어내져 길바닥에 팽개쳐졌다. 윤 양은 사건현장에서 300m 떨어진 약혼자의 집까지 차마 걸을수도 없어 100여 미터를 겨우 기어가다 쓰러졌을 정도로 최악의 폭력에 시달린 상태였고 윤 양의 울음소리를 들은 주민들에 의해 겨우 발견될 수 있었다.
윤 양은 이 때의 충격으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고 이후 기억력장애와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등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시달렸다.
3. 가해자 처벌[편집]
인간 폐기물들인 가해 초병 3인은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노 병장과 박 상병에게는 강간치상 및 명령위반혐의가 적용되었고 강간치상에는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박 일병에게는 수소이탈 혐의가 적용되었다. 재판과정에서 노병장과 박상병은 '윤 양이 만취한 채 화장실을 찾으며 스스로 청사에 들어왔다'고 하거나 '추행은 했지만 강간은 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는 등 후안무치한 언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간치상죄가 인정되어 노 병장과 박 상병은 징역 10년, 박 일병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일부 피고인은 항소했고 노 병장의 경우 대법원 상고까지 했으나 기각되었고 징역 3년형이 확정되었다.[2] 이 대법원 판례는 상해죄의 적용에 있어서 외상이 없더라도 기능의 장애를 입혔음을 이유로 상해죄의 성립을 인정한 첫 번째 판례이기도 하다.
4. 여담[편집]
-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인제에서 육군 중위가 12세 소녀를 강간한 사건이 터진 지 불과 이틀 후였고 또 닷새 후인 5월 18일 안동에서는 육군 하사 수류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군의 기강해이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 당시 기사에는 대개 난행 사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난행이란 단어는 이들의 야만적인 행각을 표현하기에 다소 두루뭉술한 감이 있다. 아무래도 적나라한 표현을 하기 어려웠던 60년대의 사회상을 고려하긴 해야겠지만. 이런 행태는 아직도 남아있어서, 현재도 언론이나 방송에서 성폭행 사건을 다룰때 '몹쓸짓'이라고 표현하는등 가해자의 행동을 순화 시키는 행위로 인해 종종 대중의 비난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