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식 장기적출 연쇄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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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530회 작성일 22-11-25 10:08본문
1. 설명[편집]
북한의 엽기 연쇄살인범 박명식이 벌인 연쇄살인으로, 확인된 피살자만 12명에 달한다.# 1990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14살부터 17살까지 청소년과 1명의 20대 여성을 상대로 연쇄살인을 벌였다. 범행 방법도 엽기적이었다. 복부를 칼로 난자한 다음 장기를 적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범행 수법도 잔인했지만, 당시 수사에 나선 함경남도 신포시[1] 보안서[2]가 제때 범인을 잡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나 주민들이 공포에 떨면서 불만이 고조됐다.
북한에도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있지만 북한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고 김씨왕조가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리하고 있어 특정 지역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인사건이 다른 지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그런 연쇄살인들 중에서도 굉장히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기에 북한 조선중앙TV와 《로동신문》에서도 보도가 되는 등[3] 아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남한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에도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있지만 북한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고 김씨왕조가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리하고 있어 특정 지역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인사건이 다른 지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그런 연쇄살인들 중에서도 굉장히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기에 북한 조선중앙TV와 《로동신문》에서도 보도가 되는 등[3] 아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남한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2. 범죄 행각[편집]
박명식이 저지른 연쇄살인의 내막은 이러했다. 박명식은 수년 전부터 간경화를 앓았다.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큰 병원과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 치료 받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박명식은 평소 가깝게 지낸 직장 동료로부터 점을 잘 친다는 점쟁이 이야기를 듣고 소개를 부탁했다.
원래 북한에서는 점쟁이나 종교 행위에 대한 통제와 단속이 심하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를 못한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여러 해를 같이 지내며 가까워진 박 씨의 동료는 그를 믿고 점쟁이를 소개해주었다. 점쟁이를 찾아간 박명식은 "자기가 지금 간경화를 심하게 앓고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라고 호소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팔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리자 점쟁이는 거절을 못하고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며칠 후 찾아온 박명식에게 점쟁이는 사람의 간을 먹어야만 간경화가 완쾌가 된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알려 주었고 뒤이어 젊은 사람의 간이어야 더욱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박명식은 집에 돌아와 고민에 빠졌다. 소심한 성격이어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느냐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박명식은 직장 안에서도 조용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병세가 자꾸만 심해지니 박 씨 눈에 독기가 돌았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점쟁이 말이라도 해보고 죽자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박명식은 봄철 농촌동원[4]을 나온 고등·중학생을 대상으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박명식은 낮에 학생들이 머무는 숙소를 찾았으며 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북한에서 농촌동원에 나온 학생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으면 모두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든다.
때마침 학생들이 잠든 사이 밤 11시경 학생들이 자고 있는 숙소에 침입한 박 씨는 한 학생의 입을 틀어 막고 준비한 흉기로 그 자리에서 급소를 찔렀다. 박 씨는 피 흘리는 학생을 숙소에서 안고 나오다 동네 개들이 짖고,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학생을 마당에 내려놓고 줄행랑을 쳤다. 흉기에 찔린 학생은 많은 피를 흘려 다음 날 아침에 사망했다. 사망한 학생은 당시 고등 중학교 4학년(15세)[5]이었다.
며칠 후 살인사건이 일어난 농장에서 4km 정도 떨어진 농장에서 또 다시 학생이 납치된 후 살해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 번째 시신은 농장원이 발견 당시에 기절할 정도로 복부가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신포시 보안서에서 수사를 했으나 범인을 잡는 데 실패했다. 보안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이런 사건이 발생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신포 시내에서 20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역시 시신의 복부가 훼손되어 있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신포시와 인근 지역에서 10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연쇄살인 사건이 계속되자 신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밤에는 다니지 못했다. 신포시 보안서 수사당국은 살인범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다.[6]
당시 신포시당 책임비서는 평양에 도당 관련해서 회의를 갈 때마다 '살인장군'이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북한에서는 점쟁이나 종교 행위에 대한 통제와 단속이 심하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를 못한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여러 해를 같이 지내며 가까워진 박 씨의 동료는 그를 믿고 점쟁이를 소개해주었다. 점쟁이를 찾아간 박명식은 "자기가 지금 간경화를 심하게 앓고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라고 호소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팔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리자 점쟁이는 거절을 못하고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며칠 후 찾아온 박명식에게 점쟁이는 사람의 간을 먹어야만 간경화가 완쾌가 된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알려 주었고 뒤이어 젊은 사람의 간이어야 더욱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박명식은 집에 돌아와 고민에 빠졌다. 소심한 성격이어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느냐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박명식은 직장 안에서도 조용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병세가 자꾸만 심해지니 박 씨 눈에 독기가 돌았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점쟁이 말이라도 해보고 죽자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박명식은 봄철 농촌동원[4]을 나온 고등·중학생을 대상으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박명식은 낮에 학생들이 머무는 숙소를 찾았으며 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북한에서 농촌동원에 나온 학생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으면 모두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든다.
때마침 학생들이 잠든 사이 밤 11시경 학생들이 자고 있는 숙소에 침입한 박 씨는 한 학생의 입을 틀어 막고 준비한 흉기로 그 자리에서 급소를 찔렀다. 박 씨는 피 흘리는 학생을 숙소에서 안고 나오다 동네 개들이 짖고,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학생을 마당에 내려놓고 줄행랑을 쳤다. 흉기에 찔린 학생은 많은 피를 흘려 다음 날 아침에 사망했다. 사망한 학생은 당시 고등 중학교 4학년(15세)[5]이었다.
며칠 후 살인사건이 일어난 농장에서 4km 정도 떨어진 농장에서 또 다시 학생이 납치된 후 살해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 번째 시신은 농장원이 발견 당시에 기절할 정도로 복부가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신포시 보안서에서 수사를 했으나 범인을 잡는 데 실패했다. 보안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이런 사건이 발생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신포 시내에서 20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역시 시신의 복부가 훼손되어 있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신포시와 인근 지역에서 10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연쇄살인 사건이 계속되자 신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밤에는 다니지 못했다. 신포시 보안서 수사당국은 살인범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다.[6]
당시 신포시당 책임비서는 평양에 도당 관련해서 회의를 갈 때마다 '살인장군'이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3. 검거[편집]
그러던 10월 어느 날 박명식은 추수동원을 나온 학생을 상대로 다시 13번째 살인을 저지르다 피해 학생이 소리치며 저항하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살인범 잡기에 혈안이 된 주민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가던 박명식을 붙잡았다. 주민들이 붙잡지 못했다면 그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을 뻔한 사건이었다. 주민들은 박명식을 신포시 보안서에 넘겼고, 이후 박명식에게 간을 먹으라고 말해준 점쟁이도 박명식의 진술에 따라 체포되면서 사건은 막을 내렸다.
4. 재판[편집]
1991년 10월 중순, 함경남도 신포시 인민재판소에서 박명식 연쇄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박명식은 공소사실을 인정했으며 12명의 생명을 앗아간 연쇄살인범으로 북한 형법 규정에 따라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총살형으로 공개 처형되었다.
이와 더불어 박명식에게 사람의 간을 먹으라고 점괘를 내준 점쟁이도 함께 신포시 인민재판소에서 살인교사 혐의로 재판을 받고 15년 노동교화형을[7] 선고 받았다. 본인이 점만 쳐줬을 뿐 특별히 살인을 지시한 게 아니라고 주장 했기에 살인교사죄 적용이 불가능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8]
이 점쟁이는 열악하기로 유명한 북한 교화소 특성과 불과 4년 뒤 시작되는 고난의 행군, 그리고 같은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경원시(敬遠視) 되어서 교화소 내에서 굶어 죽거나 맞아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형사범이라 그래도 일정 대우를 해줬는지 교화소에서 15년 복역하고 2006년에 만기 출소해서 신포시에서 다른 지방으로 추방된 상태라고 한다.[9]
이와 더불어 박명식에게 사람의 간을 먹으라고 점괘를 내준 점쟁이도 함께 신포시 인민재판소에서 살인교사 혐의로 재판을 받고 15년 노동교화형을[7] 선고 받았다. 본인이 점만 쳐줬을 뿐 특별히 살인을 지시한 게 아니라고 주장 했기에 살인교사죄 적용이 불가능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8]
이 점쟁이는 열악하기로 유명한 북한 교화소 특성과 불과 4년 뒤 시작되는 고난의 행군, 그리고 같은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경원시(敬遠視) 되어서 교화소 내에서 굶어 죽거나 맞아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형사범이라 그래도 일정 대우를 해줬는지 교화소에서 15년 복역하고 2006년에 만기 출소해서 신포시에서 다른 지방으로 추방된 상태라고 한다.[9]
5. 기타[편집]
박명식 사건은 북한 사회에 은밀히 퍼져가고 있는 점쟁이들의 폐해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북한 당국은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사상의 나라라고 떠들지만, 북한 주민들은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점괘에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북한 사회가 자주이니, 주체사상이니 떠들면서도 사람의 간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허황된 점괘를 믿고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90년대 중반까지 삶의 질은 떨어져 있었다. 잘 살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은밀히 점을 보는 현상은 먹고 살기가 더욱 힘들어진 요즘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후 고난의 행군과 함께 이런 사건은 더욱 많아졌다.
북한이탈주민 출신 기자인 주성하 기자 등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자들이 탈북한 뒤 과거를 세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탈북자들을 무작정 받아주지 말고 북한에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는 식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10]
이 사건 이후로도 북한에서는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 간간히 보도되고 있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2013년 9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유아 3명의 피를 뽑아 살해한 사건인데 사건현장 주변에 있던 22호 관리소의 수용자가 저질렀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출신 기자인 주성하 기자 등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자들이 탈북한 뒤 과거를 세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탈북자들을 무작정 받아주지 말고 북한에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는 식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10]
이 사건 이후로도 북한에서는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 간간히 보도되고 있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2013년 9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유아 3명의 피를 뽑아 살해한 사건인데 사건현장 주변에 있던 22호 관리소의 수용자가 저질렀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