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중독과 행위중독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19회 작성일 22-11-02 11:15본문
물질중독과 행위중독 이야기
“선생님, 이 약을 계속 먹으면 중독되지 않나요?”,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중독자는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얘기들은 진료 중에 환자들로부터 흔히 듣는 말이다. 도대체 중독이 뭐길래, 많은 현대인들이 이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중독’이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몇 가지 특징이 있어야 중독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중독 증상은 ‘갈망(渴望)’이다. 갈망이란 글자 그대로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알코올 중독을 예로 들면, 술을 마시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하여 술을 얻기 위해 무모한 행동이나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행위를 하는 것 등을 말한다. 심한 경우에는 가족들의 으름장 때문에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 더 이상 환자에게 술을 팔지 않자, 몇 정거장을 걸어서 옆 동네로 원정 구매(?)를 가기도 한다. 또 다른 중독자의 고백을 들으면, 술을 구하기 위해 선술집 골목 뒤편에 놓여있는 술 상자의 빈 병에 남아 있는 자투리 술을 모으다 그 안에 들어있는 담배 꽁초도 같이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내성(耐性)’이 생긴다. 알코올 중독의 예를 들면 점차 견딜 수 있는 술의 양이 증가하는 것을 내성이라고 한다. 즉, 마실수록 술이 세지는 것이다. 술에 대한 몸의 저항이 줄어드는, 어찌 보면 좋다고만 할 수 없는 현상인데도, 술이 세지면 몸도 같이 세지는 것처럼 과시하는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금단증상이다. ‘금단(禁斷)’이란 일정기간 일정 약물을 지속적으로 섭취하던 사람이 갑자기 중단한 경우에 발생하는 일련의 증상들을 말한다. 식은땀이 나거나, 손을 떨고 불안해지고, 일시적인 환각을 보이고 심각한 경우에는 의식을 잃고 간질 발작과 함께 호흡이 마비되어 사망할 수도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적절한 선에서 음주를 중단하지 못하고 다음날 중요한 약속을 어기거나, 회사에 지각 또는 결근을 하거나, 가정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최소한 부모님이나 배우자로부터 잔소리를 들으며 심각한 말싸움을 하거나 가까운 친구들과 멀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중독이란 이처럼 ▲갈망, ▲내성, ▲금단증상, 이로 인한 ▲사회적·직업적 장애의 네 가지 요소가 모두 있을 때 정의 내릴 수 있다.
다시 이 글의 맨 앞으로 돌아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보자.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물로 인하여 내성, 금단증상, 갈망, 이로 인한 사회적∙직업적 장애가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면 중독이 된다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술로 인해 내성, 금단증상, 갈망, 사회적∙직업적 장애 등이 동반된다면 알코올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세계 어느 알코올 사용장애 진단 기준이라도 얼마 이상을 먹어야 중독이라는 기준은 없다는 사실이다.
‘물질’ 뿐만 아니라 ‘행위’에도 중독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알코올이나 마약과 같은 물질뿐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이나 마약, 담배 등과 같은 물질의 중독만을 얘기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물질’뿐만 아니라 ‘특정 행동’에도 중독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우리 나라에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 등이 행위중독의 한 예다.
인터넷, 도박, 쇼핑, 성 행위의 과도한 반복은 물질중독과 마찬가지로 내성과 금단, 강박적 사용 및 갈망, 대인관계 및 사회적∙직업적 기능의 장애를 일으킨다. 약물이나 알코올이 아닌 특정 행위에 대한 반복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행위중독(behavioral addiction)’이라고 부른다.
현재 진단분류 체계 내에서 행위중독은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 성격장애, 성기능장애의 일부분 등 여기저기 흩어져 존재하였다. 그러나 최근 행위중독에 대한 임상적 관심이 커지고, 그에 따른 많은 임상연구 결과가 뒷받침되면서 물질중독과 동등한 위치를 갖고 있다.
실제로 2013년 5월에 발표된 미국 진단통계편람 5판(DSM-Ⅴ)을 보면 이전에 사용됐던 ‘물질 남용과 의존(substance abuse and dependence)’이란 분류를 삭제하고 대신, ‘중독과 관련 질환(addiction and related disease)’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 물질중독과 도박이라는 행위중독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논의하고 있다.
물질중독과 행위중독은 같은 기전
1950년대 초 신경과학자 올즈(Olds)와 밀너(Milner)는 실험용 상자 안에 쥐를 넣어두고 쥐가 스스로 지렛대를 누를 때마다 머리에 전기 자극을 받도록 장치를 하여 실험을 한 바 있다. 연구팀은 이 실험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대부분의 쥐들은 전기가 통하자마자 펄쩍 뛰거나 놀라는 등, 불쾌한 심사를 드러냈는데, 뇌의 특정 부위에 전기를 연결한 쥐 한 마리에서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혼자 스스로 전기 스위치를 천 번이 넘게 누르는 것이었다. 연구진들은 이 곳이 바로 쾌감을 느끼는 특별한 부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솜털로 코를 간지럽게 하면 결국 뇌에서 최종으로 느끼는 것처럼, 쾌감을 느끼는 최종 장소가 뇌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를 일명 ‘쾌락중추’ 또는 ‘보상중추’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중추가 마약이나 술뿐만 아니라 사람과 동물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음식 섭취, 성(sex) 행위 등을 유지하는데도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소 어렵겠지만 이 부위를 신경해부학적으로 살펴보자. ‘대뇌 보상회로(brain rewarding circuit)’ 또는 ‘쾌락 중추’라고 부르는 이 부위는 중뇌(midbrain)에 위치한 복측피개영역(VTA, ventral tegmental area)에서 전뇌(forebrain)부분의 내측전전두엽(medial prefrontal cortex)과 중격측좌핵(nucleus accumbens) 등으로 연결되는 신경회로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쾌락을 유발하는 자극이 알코올이든, 인터넷이든 상관없이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10명의 인터넷 게임 중독자의 뇌를 기능사진(fMRI)으로 찍었을 때,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그리워할 때 반응하는 뇌 부위와 게임 중독자가 게임을 그리워할 때 반응하는 뇌 부위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Ko et al, 2008). 또한 게임 중독이 아닌 일반 젊은 성인 19명에게 10일간 게임을 몰두하게 한 후에 게임의 일부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반응하는 뇌 부위와도 일치하였다(Han et al, 2011). 이들 연구 결과는 알코올 중독과 인터넷 중독에 관여하는 뇌 부위가 유사하다는 공통적인 결론을 보여준다.
중독이 되면 어떤 후유증이 있을까?
게임에 몰두하면 이해력이 저하되거나 배외측전두엽, 전대상피질과 기억력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뇌 부위(해마방회)의 부피가 줄어든다. 쉽게 말해서 머리가 나빠진다. 곧, 성장이 정상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야 할 청소년 시기에 뭔가에 빠져서 이루어야 할 정상 발달은 이루지 못하고 게임이나 ‘야동’ 등에 집착하여 뇌의 특정구조에 과부하가 걸려서 결국 균형된 뇌 발달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임 중독이 되면 충동성 또는 공격성이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지만 뇌만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학습과 폭력적인 게임 캐릭터의 흉내를 통해서 폭력성이 증가한다는 반론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알코올이나 몇몇 마약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합병증은 뇌 위축으로 인한 뇌의 전반적인 기능 저하이다. 이로 인해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나지만, 특히 기억력과 판단력이 나빠지며 심한 경우에는 알츠하이머 치매와 구별이 되지 않는 알코올에 의한 치매가 발생할 수 있다(그림 1).
알코올 중독과 같은 물질중독이나 행위중독을 이해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질병 모형인 생물학적-심리적-사회적 질병 모형으로 중독을 이해해야 한다.
즉,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스트레스 등과 그것을 이겨내는 심리적 면역성의 약화, 그리고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취약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중독이 발생한다는 관점이다. 중독으로 인해 개인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의 몸과 마음도 망가뜨리며, 결국 사회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이는 다시 그중독자에게 외부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악순환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중독을 설명하고 교육하는데 있어서 그동안은 알코올 등의 물질에 의한 간질환, 심장질환 등 뇌 이외에 다른 장기의 생물학적 기능 이상에 대한 중요성이 줄곧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뇌에 대한 임상적 연구 결과를 근거로 하여 물질이나 행위중독에 의한 뇌의 기능변화를 강조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눈부신 의학의 발전으로 심장, 폐, 신장, 간 등은 이식이 가능해지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신선한 뇌를 이식하거나 또는 생물학적으로 노화된 뇌를 젊게 만드는 치료는 먼 미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 약물중독 또는 행위중독으로 인하여 한 개인의 뇌가 신체나이보다 더 늙거나, 손상된 뇌 기능을 제 나이 또래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중독이 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것은 또한 이미 중독된 사람에게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독의 치료는 뇌의 기능과 구조 변화를 고려하는 생물학적 접근이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