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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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397회 작성일 23-01-05 14:24본문
1. 개요
2. 요약[편집]
이한영은 임시거처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시범현대아파트 418동 1402호에 들어서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앞 14층 복도에서 북한 사회문화부 공작원들에 의해 피습을 당했다. 무기는 대남 간첩들이 주로 사용하는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 권총으로, 실탄 1발이 이마에 관통하였다.
사건을 목격한 대학선배 부인은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무슨 일인가 싶어 비디오폰으로 확인한 결과 괴한 2명이 이한영에게 권총을 겨누고 이 중 한 명이 실탄을 발사한 뒤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쓰러진 이씨에게 "누가 그랬느냐" 고 묻자,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며 "간첩, 간첩" 이라고 말한 뒤 의식을 잃었다. 성남 경희분당차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서 산소호흡기에 숨을 의지하다가 10일 후 사망하였다.
쓰러진 이씨에게 "누가 그랬느냐" 고 묻자,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며 "간첩, 간첩" 이라고 말한 뒤 의식을 잃었다. 성남 경희분당차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서 산소호흡기에 숨을 의지하다가 10일 후 사망하였다.
3. 암살 이전과정
1996년 10월 8일, 당시 거처를 옮기고 같은해 가을부터 언론과의 접촉을 잠정 중단한 그는 돈벌이를 찾으며 오퍼상을 차려 재기를 노릴만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에 있었다.
사건에 앞서 이한영은 아내에게 혹시라도 자신이 총에 맞을때를 대비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몇몇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언제, 어디서든 뒤에서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 며 항시 긴장을 풀지말라고 당부했고, 그는 사건발생 1년 전 신변이 노출된 이후로 매우 자주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이한영의 부탁에 의해 1997년 2월말까지 약 2달간 자신의 집 방 한칸을 임시로 내어준 대학선배와 사건발생 보름전쯤인 1997년 1월말쯤하여 두차례 술을 마시면서도 담담하게 "선생님. 저는 언제 총에 맞아죽을지도 몰라요."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신변을 걱정했다는 게 주위 인물들의 증언이다. KBS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친구는 "한영이는 평소 매우 쾌활했지만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불안하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1996년 추석 때는 여행을 계획했다가 잠수함사건으로 취소하는 등 남북간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매우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휴대전화만을 사용, 거처의 전화 사용을 삼갔다고 한다. 그를 찾는 전화가 오면 "연락만 할 수 있다, 전화가 오면 연락해주겠다"는 식으로 응대, 직접 전화를 받는 일이 없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한편, 북한 최고의 귀족 자제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그는 남한에서 14년동안 은둔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본주의의 퇴폐문화에 빠지는가 하면 10여차례에 걸친 사업실패와 이사, 한차례 옥살이까지 경험하는 등 비운의 연속이었다.
이씨는 한양대학교 재학중이었던 1987년 12월부터 KBS PD로 일하면서 휴학을 두번씩이나 했고, 1990년 2월 뒤늦게 대학을 졸업한 뒤 강남의 개나리아파트로 옮겼다. 그후 이씨가 KBS 국제방송 PD로 근무할때 주택조합에 관여하게 되자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1990년 4월 KBS를 그만두고 '인터커넥션' 이라는 주택 건설업체를 차렸다.
그러나 1993년 3월 수익금 횡령혐의로 신고를 당해 1994년 1윌까지 수감생활을 하면서 석방 후, 이씨는 1994년 여름 대학선배 김씨에게 연락하여 김씨의 주선으로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청구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그후에도 역삼동과 반포동 등으로 거처를 두 번 옮겼다.
이씨는 생활고와 테러 위협 등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1996년초 부산으로 내려와 2~3개월 동안 러시아인을 상대로 통역일을 하였고, 그 후에는 2~3개월동안 경기도 평촌의 한 백화점 점포에서 팝콘 매장일을 하는 등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편, 이씨가 원한관계에 의해 피격됐을 가능성도 배제시키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1993년 탤런트와 모델, 고위층 자녀들이 낀 도박단을 내사하는 과정에서 핵심인물로 떠올랐다고 한다.
1996년 5월 사업실패로 전세로 살고 있던 분당의 47평짜리 청구아파트를 날린 뒤 짐은 이삿짐 센터에 맡겨놓고 부인과 딸을 강동구 상일동 처가집으로 보낸 뒤, 자신은 친구집과 안기부가 붙여준 안가(안전가옥)를 전전했다. 1년 가까이 보관(엄밀히 말하면 방치)된 자신의 짐을 찾는 일은 엄두도 못내고, 보관비를 대는 일도 그렇거니와 집이 없으니 둘 곳조차 없는 탓이었다. 친구집을 전전하다가 눈치가 보이면 간혹 처가에 들러 가족들과 만나는 식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96년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발간됐던 자서전은 그의 호주머니 사정을 다소 펴지게 했다. 어머니로부터 돈을 받아 빚도 모두 정리했다. 하지만 그 돈은 사업파산의 후유증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일목요연하게 사용하지 못해 다시 거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96년 8월 17일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이한영씨는 자신의 유일한 꿈은 '미국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딘가에 있을 어머님을 모시고 마누라·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나마 자신을 버티게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수차례 안기부에 미국행을 희망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들어올 '자유'는 허용했지만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당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도 토로했다.
약 3시간동안의 인터뷰 기간동안 그와 기자가 나눈 대화 소재는 대부분이 안기부와 언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13년간의 남한 생활중 안기부는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초 미국행을 희망했던 그를 한국사회로 인도한 것도 안기부였고 직장 알선, 성형수술 등 그의 삶 곳곳에 안기부의 잔영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안기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특히 동아일보에서 출간한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집필 과정에서 안기부와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것 같았다.
당시 안기부는 이씨가 집필한 내용 가운데 안가 위치, 수사 내용 등 10여군데 대목 삭제를 요구했고 이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가 끝내 상당부분이 빠지거나 고쳐진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로 이씨는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 주차장에서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멱살을 잡히는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가'에서 쫓겨났고 거처가 없던 그의 부인과 딸은 친정집에 들어갔다.
그가 언론에 보인 반응은 한마디로 냉소 그 자체였다. 이씨는 "기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한마디만 들어도 그럴싸하게 기사로 만든다. 상황이 이처럼 꼬인 책임의 많은 부분이 언론에게 있다"며 언론의 작문 실력을 놀라워했다. 결정적으로 이모와 어머니의 망명이 매끄럽게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일부 언론의 보도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 가치에 비해 안기부와 언론이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이씨를 맨처음 세상에 공개한 것이 언론이지만 언론은 그에 대해 일관되게 '상품'이라는 시각을 유지했다. 신변 위협이나 '처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성혜림씨 망명 사건이 터졌을 때는 이씨는 자신과 상대했던 일부 기자들에 대해선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안기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언론이 '무관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한영의 부탁에 의해 1997년 2월말까지 약 2달간 자신의 집 방 한칸을 임시로 내어준 대학선배와 사건발생 보름전쯤인 1997년 1월말쯤하여 두차례 술을 마시면서도 담담하게 "선생님. 저는 언제 총에 맞아죽을지도 몰라요."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신변을 걱정했다는 게 주위 인물들의 증언이다. KBS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친구는 "한영이는 평소 매우 쾌활했지만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불안하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1996년 추석 때는 여행을 계획했다가 잠수함사건으로 취소하는 등 남북간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매우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휴대전화만을 사용, 거처의 전화 사용을 삼갔다고 한다. 그를 찾는 전화가 오면 "연락만 할 수 있다, 전화가 오면 연락해주겠다"는 식으로 응대, 직접 전화를 받는 일이 없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한편, 북한 최고의 귀족 자제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그는 남한에서 14년동안 은둔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본주의의 퇴폐문화에 빠지는가 하면 10여차례에 걸친 사업실패와 이사, 한차례 옥살이까지 경험하는 등 비운의 연속이었다.
이씨는 한양대학교 재학중이었던 1987년 12월부터 KBS PD로 일하면서 휴학을 두번씩이나 했고, 1990년 2월 뒤늦게 대학을 졸업한 뒤 강남의 개나리아파트로 옮겼다. 그후 이씨가 KBS 국제방송 PD로 근무할때 주택조합에 관여하게 되자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1990년 4월 KBS를 그만두고 '인터커넥션' 이라는 주택 건설업체를 차렸다.
그러나 1993년 3월 수익금 횡령혐의로 신고를 당해 1994년 1윌까지 수감생활을 하면서 석방 후, 이씨는 1994년 여름 대학선배 김씨에게 연락하여 김씨의 주선으로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청구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그후에도 역삼동과 반포동 등으로 거처를 두 번 옮겼다.
이씨는 생활고와 테러 위협 등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1996년초 부산으로 내려와 2~3개월 동안 러시아인을 상대로 통역일을 하였고, 그 후에는 2~3개월동안 경기도 평촌의 한 백화점 점포에서 팝콘 매장일을 하는 등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편, 이씨가 원한관계에 의해 피격됐을 가능성도 배제시키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1993년 탤런트와 모델, 고위층 자녀들이 낀 도박단을 내사하는 과정에서 핵심인물로 떠올랐다고 한다.
1996년 5월 사업실패로 전세로 살고 있던 분당의 47평짜리 청구아파트를 날린 뒤 짐은 이삿짐 센터에 맡겨놓고 부인과 딸을 강동구 상일동 처가집으로 보낸 뒤, 자신은 친구집과 안기부가 붙여준 안가(안전가옥)를 전전했다. 1년 가까이 보관(엄밀히 말하면 방치)된 자신의 짐을 찾는 일은 엄두도 못내고, 보관비를 대는 일도 그렇거니와 집이 없으니 둘 곳조차 없는 탓이었다. 친구집을 전전하다가 눈치가 보이면 간혹 처가에 들러 가족들과 만나는 식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96년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발간됐던 자서전은 그의 호주머니 사정을 다소 펴지게 했다. 어머니로부터 돈을 받아 빚도 모두 정리했다. 하지만 그 돈은 사업파산의 후유증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일목요연하게 사용하지 못해 다시 거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96년 8월 17일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이한영씨는 자신의 유일한 꿈은 '미국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딘가에 있을 어머님을 모시고 마누라·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나마 자신을 버티게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수차례 안기부에 미국행을 희망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들어올 '자유'는 허용했지만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당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도 토로했다.
약 3시간동안의 인터뷰 기간동안 그와 기자가 나눈 대화 소재는 대부분이 안기부와 언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13년간의 남한 생활중 안기부는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초 미국행을 희망했던 그를 한국사회로 인도한 것도 안기부였고 직장 알선, 성형수술 등 그의 삶 곳곳에 안기부의 잔영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안기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특히 동아일보에서 출간한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집필 과정에서 안기부와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것 같았다.
당시 안기부는 이씨가 집필한 내용 가운데 안가 위치, 수사 내용 등 10여군데 대목 삭제를 요구했고 이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가 끝내 상당부분이 빠지거나 고쳐진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로 이씨는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 주차장에서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멱살을 잡히는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가'에서 쫓겨났고 거처가 없던 그의 부인과 딸은 친정집에 들어갔다.
그가 언론에 보인 반응은 한마디로 냉소 그 자체였다. 이씨는 "기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한마디만 들어도 그럴싸하게 기사로 만든다. 상황이 이처럼 꼬인 책임의 많은 부분이 언론에게 있다"며 언론의 작문 실력을 놀라워했다. 결정적으로 이모와 어머니의 망명이 매끄럽게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일부 언론의 보도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 가치에 비해 안기부와 언론이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이씨를 맨처음 세상에 공개한 것이 언론이지만 언론은 그에 대해 일관되게 '상품'이라는 시각을 유지했다. 신변 위협이나 '처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성혜림씨 망명 사건이 터졌을 때는 이씨는 자신과 상대했던 일부 기자들에 대해선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안기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언론이 '무관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그는 이전에 모스크바 유학 시절 익힌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살려 1995년 부산항에서 러시아 상인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역시 6개월만에 그만뒀다.
1996년에는 생활이 어렵자 소위 '인터걸' 거래를 하는 모스크바 상인과 어울려 지내기까지 했다는 것. 이씨는 러시아를 상대로 한 무역업을 하면서 상당액의 빚을 졌으며 이 때문에 변제압력을 받아왔다는 것. 이씨는 또 이때 러시아 매춘여성인 인터걸 소개업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러시아 마피아단원들과 접촉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돈에 쪼들린 이씨는 1996년 2월 성혜림 사건이 터지면서 언론사를 상대로 '정보팔기' 에 나서 수천만원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망명이 허위로 밝혀지면서 신뢰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재벌을 염두에 둔 이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서울 양재동의 한 상가 지하에 J-KOREA라는 판촉물 대행회사를 차려 그런대로 순조로운 출발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업 실패로 인한 의기소침에서도 벗어나 오퍼상을 차리고 재기를 노린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큰소리도 쳐보는 단계에서 피격의 불운을 맞게 됐다.
이한영은 1996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자신의 한양대 대학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사업때문에 살고있던 전세 아파트마저 날아가버려 갈곳이 없어 2월말 원룸아파트가 마련될 때까지 신세를 지겠다"고 말해 대학선배 딸의 공부방을 비워줬는데 실제 집에 들어와서 잔 것은 며칠 안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인 김종은씨와, 딸 예인이를 처가에 맡기고 별거생활을 하며 돈벌이를 찾고 있었다. 친구 사업장과 전광판 광고회사에 기웃거리며 일거리를 찾다가 얼마전 부산을 다녀왔다며 한•러 무역의 한자락을 잡고 밥벌이 할 일이 있나 싶어서였다. 그는 "수산물쪽 수입 사업에 도울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내년(1997년) 1월이나 되어봐야 확실한 결과가 나올 것" 이란게 그의 말이었다.
그간 워낙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관계로 예전과 달리 장담을 삼가는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가야 할 뿐 달리 대안이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첫 직장인 방송사에서도 러시아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제방송 일을 했고 사정이 어려워진 최근까지도 북한관련 정보분석이나 러시아어 학원강사 자리라도 없나 뒤집고 다녔을 정도다.
1997년 1월 10일부터 부인의 이름으로 갤러리아 잠실점과 압구정점, 뉴코아 본점, 논현동 나산백화점, 대치동그랜드백화점 등 5곳에서 부인, 동서와 함께 캔디와 초콜릿을 파는 임시매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사건 전날까지 밸런타인데이 특수로 바빴다. 이한영은 "장사가 잘돼 곧 고정매장을 얻을 수 있겠다" 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씨는 사고가 있기 두 달 전부터 부인 김씨와 협의이혼 절차를 밟고 별거중인 상황이었다. 당시 이씨는 부인에게까지 사업 실패로 인해 생긴 채무의 짐을 지워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혼절차를 밟고 있었고, 피격전날까지 두 사람은 같이 일하고 있었다.
이한영의 아내 김씨는 사건 직후 "남편이 방송에 출연하고 책을 펴내 신분을 노출시키고 북한을 자극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했다. 이한영은 자주 "다시 성형수술을 하고 한국보다 비교적 안전한 미국으로 이주하여 서방으로 탈출한 가족들과 만나 함께 완전히 잠적하고 싶다"고 말하며 딸의 교육을 위해 여권까지도 준비해놓을 정도였다는 것.
이한영의 불안감은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과, 황장엽 망명 사건으로 더욱 증폭돼 "남편은 북한이 보복을 하면 첫 대상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아내 김씨는 전했다. 이로 인해 1996년 가을부터는 아예 거처와, 휴대폰번호, 무선호출기 번호까지 바꾸었고 사건발생 직전까지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부대상의 공개강좌에 나설 것을 적극 검토하다가 신분노출을 우려해 계약단계에서 포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6년에는 생활이 어렵자 소위 '인터걸' 거래를 하는 모스크바 상인과 어울려 지내기까지 했다는 것. 이씨는 러시아를 상대로 한 무역업을 하면서 상당액의 빚을 졌으며 이 때문에 변제압력을 받아왔다는 것. 이씨는 또 이때 러시아 매춘여성인 인터걸 소개업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러시아 마피아단원들과 접촉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돈에 쪼들린 이씨는 1996년 2월 성혜림 사건이 터지면서 언론사를 상대로 '정보팔기' 에 나서 수천만원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망명이 허위로 밝혀지면서 신뢰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재벌을 염두에 둔 이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서울 양재동의 한 상가 지하에 J-KOREA라는 판촉물 대행회사를 차려 그런대로 순조로운 출발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업 실패로 인한 의기소침에서도 벗어나 오퍼상을 차리고 재기를 노린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큰소리도 쳐보는 단계에서 피격의 불운을 맞게 됐다.
이한영은 1996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자신의 한양대 대학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사업때문에 살고있던 전세 아파트마저 날아가버려 갈곳이 없어 2월말 원룸아파트가 마련될 때까지 신세를 지겠다"고 말해 대학선배 딸의 공부방을 비워줬는데 실제 집에 들어와서 잔 것은 며칠 안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인 김종은씨와, 딸 예인이를 처가에 맡기고 별거생활을 하며 돈벌이를 찾고 있었다. 친구 사업장과 전광판 광고회사에 기웃거리며 일거리를 찾다가 얼마전 부산을 다녀왔다며 한•러 무역의 한자락을 잡고 밥벌이 할 일이 있나 싶어서였다. 그는 "수산물쪽 수입 사업에 도울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내년(1997년) 1월이나 되어봐야 확실한 결과가 나올 것" 이란게 그의 말이었다.
그간 워낙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관계로 예전과 달리 장담을 삼가는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가야 할 뿐 달리 대안이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첫 직장인 방송사에서도 러시아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제방송 일을 했고 사정이 어려워진 최근까지도 북한관련 정보분석이나 러시아어 학원강사 자리라도 없나 뒤집고 다녔을 정도다.
1997년 1월 10일부터 부인의 이름으로 갤러리아 잠실점과 압구정점, 뉴코아 본점, 논현동 나산백화점, 대치동그랜드백화점 등 5곳에서 부인, 동서와 함께 캔디와 초콜릿을 파는 임시매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사건 전날까지 밸런타인데이 특수로 바빴다. 이한영은 "장사가 잘돼 곧 고정매장을 얻을 수 있겠다" 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씨는 사고가 있기 두 달 전부터 부인 김씨와 협의이혼 절차를 밟고 별거중인 상황이었다. 당시 이씨는 부인에게까지 사업 실패로 인해 생긴 채무의 짐을 지워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혼절차를 밟고 있었고, 피격전날까지 두 사람은 같이 일하고 있었다.
이한영의 아내 김씨는 사건 직후 "남편이 방송에 출연하고 책을 펴내 신분을 노출시키고 북한을 자극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했다. 이한영은 자주 "다시 성형수술을 하고 한국보다 비교적 안전한 미국으로 이주하여 서방으로 탈출한 가족들과 만나 함께 완전히 잠적하고 싶다"고 말하며 딸의 교육을 위해 여권까지도 준비해놓을 정도였다는 것.
이한영의 불안감은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과, 황장엽 망명 사건으로 더욱 증폭돼 "남편은 북한이 보복을 하면 첫 대상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아내 김씨는 전했다. 이로 인해 1996년 가을부터는 아예 거처와, 휴대폰번호, 무선호출기 번호까지 바꾸었고 사건발생 직전까지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부대상의 공개강좌에 나설 것을 적극 검토하다가 신분노출을 우려해 계약단계에서 포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씨는 1996년 6월 수기를 낸 뒤 안기부안가를 나왔으나 사업부진으로 잠실 처가, 양재동 친구집, 분당 김씨 집 등을 전전하고 있었다. 이씨의 한 친구는 이한영이 "안기부 담당관을 찾아도 연락조차 안된다. 안기부는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지난 1982년 망명하여 서울에 온 직후 8개월간의 안가생활 이후 독립해 있던 그는 언론에 공개된 1996년 2월 중순 이후 다시 안가로 들어갔는데, 수기가 발간된 후 쫓겨났다는 것. 따라서 범인들이 이씨의 임시거처인 김씨 집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상당기간 이씨의 뒤를 밟아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씨는 설을 앞둔 1997년 1월말 무렵 부인과 딸을 잠실 처가에 보내었다. 한편, 이씨의 외삼촌이자 김정일의 처남인 성일기씨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살다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씨의 서방탈출보도'로 주거지가 노출된 이후 신변안전의 이유로 1996년 3월 성수동으로 옮겨 생활하고 있었는데 성씨 가족의 말에 따르면 1997년초에 조카 이씨가 세배하러 집에 한차례 왔으며, 그런 이씨에게 "앞으로 가능하면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직장일에만 충실해라"고 당부했는데 이같은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
범인들이 현대아파트 14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이씨를 붙잡아 총격을 가했다는 것은 평소 이씨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당일 귀가시간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씨는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비서의 망명이 알려진 지난 12일 이후 집에 들어오지 못하다 오랜만에 귀가하던 중이었다.
이씨는 1996년 11월 'J코리아'라는 판촉회사를 만들었다. 1997년 1월 3일부터 지인에게 유통을 배워가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했으며, 이씨는 그 사업의 하나로 밸런타인데이인 1997년 2월 10일부터 2월 14일까지 발렌타인 특수행사를 위해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1층 매장에서 팔 초콜릿을 포장하느라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강남의 여관에서 잤다. 따라서 이날 범인들이 며칠만에 귀가하는 이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이씨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건발생 열흘 전쯤 전화국 직원이라고 밝힌 남자가 대학선배 김씨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이한영씨가 전화가설을 요청했는데 어디다 어떻게 설치해야 하느냐"고 물은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김씨나 이씨 모두 전화가설을 신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문화부 특수공작 3인조, <순호조> 공작원들인 조장 최순호와 윤동철, 미상 1명이 사건발생 한달전쯤하여 위조여권으로 중국을 통해 신분세탁 후 공항으로 입국했으며, 입국 후 고정 간첩들과 접선하여 강원도 번호판 현대 쏘나타 대포차량[3]을 제공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한영이 피격된 15일 이전에 이씨와 같은 성남시 분당구에 살고있는 '이한영' 이라는 이름의 12명에게 전화국 직원이나 기자를 사칭한 전화가 걸려왔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에는 고정간첩이 틀림없는 여자 목소리의 전화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범인들이 범행 직전 집중적으로 이씨 행적을 추적했던 점으로 미뤄, 이씨에게 테러를 가하기 위해 범행 얼마 전에 남파된 간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씨는 설을 앞둔 1997년 1월말 무렵 부인과 딸을 잠실 처가에 보내었다. 한편, 이씨의 외삼촌이자 김정일의 처남인 성일기씨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살다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씨의 서방탈출보도'로 주거지가 노출된 이후 신변안전의 이유로 1996년 3월 성수동으로 옮겨 생활하고 있었는데 성씨 가족의 말에 따르면 1997년초에 조카 이씨가 세배하러 집에 한차례 왔으며, 그런 이씨에게 "앞으로 가능하면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직장일에만 충실해라"고 당부했는데 이같은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
범인들이 현대아파트 14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이씨를 붙잡아 총격을 가했다는 것은 평소 이씨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당일 귀가시간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씨는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비서의 망명이 알려진 지난 12일 이후 집에 들어오지 못하다 오랜만에 귀가하던 중이었다.
이씨는 1996년 11월 'J코리아'라는 판촉회사를 만들었다. 1997년 1월 3일부터 지인에게 유통을 배워가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했으며, 이씨는 그 사업의 하나로 밸런타인데이인 1997년 2월 10일부터 2월 14일까지 발렌타인 특수행사를 위해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1층 매장에서 팔 초콜릿을 포장하느라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강남의 여관에서 잤다. 따라서 이날 범인들이 며칠만에 귀가하는 이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이씨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건발생 열흘 전쯤 전화국 직원이라고 밝힌 남자가 대학선배 김씨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이한영씨가 전화가설을 요청했는데 어디다 어떻게 설치해야 하느냐"고 물은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김씨나 이씨 모두 전화가설을 신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문화부 특수공작 3인조, <순호조> 공작원들인 조장 최순호와 윤동철, 미상 1명이 사건발생 한달전쯤하여 위조여권으로 중국을 통해 신분세탁 후 공항으로 입국했으며, 입국 후 고정 간첩들과 접선하여 강원도 번호판 현대 쏘나타 대포차량[3]을 제공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한영이 피격된 15일 이전에 이씨와 같은 성남시 분당구에 살고있는 '이한영' 이라는 이름의 12명에게 전화국 직원이나 기자를 사칭한 전화가 걸려왔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에는 고정간첩이 틀림없는 여자 목소리의 전화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범인들이 범행 직전 집중적으로 이씨 행적을 추적했던 점으로 미뤄, 이씨에게 테러를 가하기 위해 범행 얼마 전에 남파된 간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3.1. 사건 발단: 모스크바 바빌로바 거리 국제전화 시도[편집]
- 1995년 10월 20일 금요일 오후 4시경
1993년 9월이었다. 김일성 연구 전문가인 성균관대 이명영 교수로부터 들은, "김정일의 본처 성혜림이 신병치료차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는 한 마디가 단서였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우종창은 이를 추적해 1994년 1월 20일자 주간조선에 "김정일 처남 서울에 살고 있다"란 기사를 썼고, 이 기사가 인연이 되어 미공개 상태로 서울에 살고 있던 성혜랑씨의 외아들 이한영을 만나게 되었다.
이한영은 돈이 궁해 KBS 재직시절 같이 근무한 동기의 소개로 1995년 9월말경 동아일보로 찾아가 출판국 간부를 만나 "수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내보였으나 그곳에서는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며칠후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고 밝혔다. 신동아는 당시 이한영이 자신과 김정일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밝히지 않은데다 신원조회결과 이씨가 사기전과자(과거 횡령혐의로 서울구치소 10개월 복역)로 밝혀지자 이씨의 주장에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씨는 1977년 윤정희씨 납치 사건에 김정일이 개입돼 있다는 정보를 흘렸으나 자신의 신분에 대해선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측에서 이씨에 대해 안기부에 문의하자 안기부 측에서는 "지금은 그 사람의 신분을 공개할 시점이 아니다"며 이씨를 기사화 할 동아일보의 보도를 만류한 것이 신동아가 이씨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 큰 이유중의 하나였다.
어찌됐든 이한영은 그후 월간조선을 찾았고 우종창은 이한영의 외삼촌인 성일기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생포되어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기사를 썼고, 그후 이한영은 당시 사업실패후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던지라 자신의 외삼촌의 기사를 썼던 기자에게 도움을 얻으려고 자신이 성일기의 조카라는 것을 우종창에게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촌 여동생(외삼촌 딸)을 데리고 아내와 6살난 딸과 함께 당시 우종창 기자가 있던 조선일보 출판국장실을 방문하였다.
두사람은 서로 커피를 마시며 그의 귀순 과정과 귀순 후 서울 생활을 들으면서 기자는 중요한 정보 하나를 듣게 되었다. 기자가 그토록 찾았던 김정일 본처 성혜림씨의 모스크바 주소와 전화번호를 그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개인적인 속사정을 조심스레 이야기하면서 당시 처형의 카드로 수천만원의 빚을 낸 상태였고, 또 가계수표를 발행했는데 일주일내에 갚지 못하면 구속될것이라며 경제적으로 500만원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월간조선측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이씨와 작성한 계약서는 모두 2통. 1995년 10월 20일 우종창기자와 이씨가 5백만원의 계약금에 이씨 증언 및 인터뷰 주선과 관련 1차 계약을 했고 1995년 12월 30일 수기 출판, 영화제작에 대한 독점 계약을 5백만원에 체결했다. 이 가운데 1차 계약금으로 지불된 5백만원은 12월 28일 안기부가 갚았다.
경향은 취재기자와 이씨의 친분으로 이씨와 두차례에 걸쳐 단독 인터뷰를 갖고 '김일성 아들(김현) 또 있다' 등을 단독 보도했다. 여타 언론사들은 이씨와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수백만원대의 사례비를 지불하면서 성혜랑씨와 이씨의 미공개 전화 통화내용이 담긴 테이프, 독점 인터뷰등을 성사시켰다.
이한영은 돈이 궁해 KBS 재직시절 같이 근무한 동기의 소개로 1995년 9월말경 동아일보로 찾아가 출판국 간부를 만나 "수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내보였으나 그곳에서는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며칠후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고 밝혔다. 신동아는 당시 이한영이 자신과 김정일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밝히지 않은데다 신원조회결과 이씨가 사기전과자(과거 횡령혐의로 서울구치소 10개월 복역)로 밝혀지자 이씨의 주장에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씨는 1977년 윤정희씨 납치 사건에 김정일이 개입돼 있다는 정보를 흘렸으나 자신의 신분에 대해선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측에서 이씨에 대해 안기부에 문의하자 안기부 측에서는 "지금은 그 사람의 신분을 공개할 시점이 아니다"며 이씨를 기사화 할 동아일보의 보도를 만류한 것이 신동아가 이씨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 큰 이유중의 하나였다.
어찌됐든 이한영은 그후 월간조선을 찾았고 우종창은 이한영의 외삼촌인 성일기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생포되어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기사를 썼고, 그후 이한영은 당시 사업실패후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던지라 자신의 외삼촌의 기사를 썼던 기자에게 도움을 얻으려고 자신이 성일기의 조카라는 것을 우종창에게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촌 여동생(외삼촌 딸)을 데리고 아내와 6살난 딸과 함께 당시 우종창 기자가 있던 조선일보 출판국장실을 방문하였다.
두사람은 서로 커피를 마시며 그의 귀순 과정과 귀순 후 서울 생활을 들으면서 기자는 중요한 정보 하나를 듣게 되었다. 기자가 그토록 찾았던 김정일 본처 성혜림씨의 모스크바 주소와 전화번호를 그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개인적인 속사정을 조심스레 이야기하면서 당시 처형의 카드로 수천만원의 빚을 낸 상태였고, 또 가계수표를 발행했는데 일주일내에 갚지 못하면 구속될것이라며 경제적으로 500만원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월간조선측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이씨와 작성한 계약서는 모두 2통. 1995년 10월 20일 우종창기자와 이씨가 5백만원의 계약금에 이씨 증언 및 인터뷰 주선과 관련 1차 계약을 했고 1995년 12월 30일 수기 출판, 영화제작에 대한 독점 계약을 5백만원에 체결했다. 이 가운데 1차 계약금으로 지불된 5백만원은 12월 28일 안기부가 갚았다.
경향은 취재기자와 이씨의 친분으로 이씨와 두차례에 걸쳐 단독 인터뷰를 갖고 '김일성 아들(김현) 또 있다' 등을 단독 보도했다. 여타 언론사들은 이씨와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수백만원대의 사례비를 지불하면서 성혜랑씨와 이씨의 미공개 전화 통화내용이 담긴 테이프, 독점 인터뷰등을 성사시켰다.
- 당일 오후 6시경
이날 결론적으로 우종창은 이한영의 딱한 사정을 듣고서는 "돈을 갚지 않아도 좋다. 다만 모스크바를 떠날 당시 이모(성혜림)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가라" 고 요구했으며, 더 나아가 "이왕 온 김에 우리 여기서 전화 한번 해보자" 고 선뜻 제안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이씨의 어머니였고, 13년이란 세월로 인해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하였으나 3번의 전화시도 끝에 서로의 신분확인에 성공하게 되고 약 40분간의 통화가 이어졌다.
모스크바측의 망명의사를 물었더니 호의적이었으며, 어머니 성혜랑은 제3국 거주를 희망했지만, 김정일 본처 성혜림씨가 "서울에서 오빠와 같이 살겠다" 고 강력히 희망해 이들의 서울행은 기정사실로 보여졌다.
김정일은 성혜림을 위해 15호 관저(김정일 공관)의 요리사, 하녀, 운전사 등을 파견해 수발을 들게 하고, 여행을 위해서는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2백만달러짜리 별장도 사주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요양해있던 쇠약한 성혜림을 보살피던 이한영이 1982년 망명한 이후, 1983년부터는 그 대신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이 성혜림을 보살폈다.
모스크바측의 망명의사를 물었더니 호의적이었으며, 어머니 성혜랑은 제3국 거주를 희망했지만, 김정일 본처 성혜림씨가 "서울에서 오빠와 같이 살겠다" 고 강력히 희망해 이들의 서울행은 기정사실로 보여졌다.
김정일은 성혜림을 위해 15호 관저(김정일 공관)의 요리사, 하녀, 운전사 등을 파견해 수발을 들게 하고, 여행을 위해서는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2백만달러짜리 별장도 사주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요양해있던 쇠약한 성혜림을 보살피던 이한영이 1982년 망명한 이후, 1983년부터는 그 대신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이 성혜림을 보살폈다.
어머니는 이미 내 소식을 듣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사는 교포중에 A씨가 있다. A씨는 어머니에게 내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10월 20일 나와 통화하기전에 내가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통화에서 "A씨 통해서 네 소식 들었다. 네가 서울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A씨도 남한출신인데, 월북 후 6.25를 전후해 평양에서 할머니에게 자주 놀러왔었다고 한다. 남한에서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A씨는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다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소련으로 망명했는데, 이모가 모스크바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한번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가 1990년대 초 모스크바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당시 A씨는 이모와 김정일과의 관계는 모르고 있었다. 이모가 A씨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서 적어주었는데, 그 후 가끔 이모가 연락해서 통화를 했다는 것이다.
A씨는 서울에 여러번 왔었다. 처음 왔을 때는 내가 KBS에 있을 때인데, 내가 통역을 했기 때문에 그는 나를 몰랐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있었다. 한국말을 잘해 A씨만 있을 때면 통역이 필요 없었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교포학자들 때문에 내가 통역으로 나갔다. A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서울에 왔는데, A씨가 이모를 안다는 것을 알고 안기부에서 내 소식을 전해준 것 같다. A씨는 1992년 서울의 외삼촌도 만났다. A씨는 외삼촌에게 "혜림이는 잘 있다. 내가 다 만나봤다. 이것저것 괴로우면 고향으로 가라고 얘기해줬다. 그랬더니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그러더라"는 얘기를 전했다고 한다.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 행복과 감옥사이에서 (340-34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