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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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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346회 작성일 22-12-2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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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북되고 최은희를 찾으러 온 신상옥 감독까지 동년 7월 19일에 납북된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함께 당시만 해도 아직 베일에 가려진 김정일이라는 존재를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사건이다.[1] 

2. 납북 과정[편집]

당시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뒤[2][3]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직을 역임하며[4] 후학 양성 중이었다.

그 때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사람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및 지원을 의논하고 싶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한다. 신상옥 감독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후원 교섭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최은희는 학교의 발전을 생각하며 홍콩으로 갔는데, 며칠 일정대로 움직이더니 마카오로 넘어갔다가 뜬금없이 중국 본토로 가는 배에 태우고 '우리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최은희는 울며불며 내려달라고 외쳤지만 결국 이들이 준비한 마취제에 의해 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배 안의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벽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기절했다고…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서 실종된 최은희를 수소문하다가 자신의 지인과 친한 사이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까지 정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는데, '납북이 틀림없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지만 수십년을 같이 지내온 동반자가 사라졌다는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이유가 납북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5]

결국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신상옥 감독도 납북되고 만다.[6] 현지에서 신필림 홍콩지사를 운영하던 교포 이영생이 사실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던 것. 거기에 신상옥의 지인이자 신필림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던 김규화가 그들이 쥐어주는 돈에 넘어가서 거짓 일정을 만들어준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는 귀국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을 복역했다.

납북 루트는 홍콩에서 당시 북한 공작원의 아지트였던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북한에 들어간 것. 북한인의 홍콩 입국은 까다로운 관계로 일본으로 귀화한 조총련계 인사들을 앞세웠으며 이들은 일본 여권을 들고 있어 홍콩 이민국의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홍콩 경찰은 형사조사국(CID)을 앞세워 두 사람을 중국 본토로 끌고 간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추적했고, 이들의 정체가 북한 공작원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3. 월북 루머[편집]

사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이제서야 납북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으로 밀입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박정희와 신상옥의 불화가 배경이었다. 시작은 신상옥이 겁도 없이 전태일 분신사건을 영화로 찍겠다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당연히 분노한 박정희 정권은 신상옥의 영화 촬영을 방해했다. 여기에 화가 난 신상옥은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자신의 영화에서 검열삭제 당한 오수미의 상반신 노출장면을 예고편에 집어넣는 반항을 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의 인가를 취소당했고, 신상옥이 여기에 행정소송을 냈다가 남산으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있었다. 결국 행정소송은 취하되었다. 최은희가 납북되는 계기인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경우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상옥이 이사장인 학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면 정치적 외압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라진 것이다. 납북보다 밀입국 설이 신빙성을 갖고 회자될 수 밖에 없었다.

4. 북한에서의 생활[편집]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은희의 경우 남포항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 최은희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7] 최은희는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겨 악수를 했고 공식 사진도 남아 있다. 최은희는 주변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서 움찔움찔 놀라고 신경질적으로 찍지말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 감독의 경우에는 납치된 이후에 처음엔 배후를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8] 자신을 납치한 것이 북측의 공작원들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죽일 속셈은 아닐거라 여기고 여유있는 모습을 취하며 배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등 공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렸다. 북한에 끌려온 다음엔 벤츠 승용차를 탈취해서 청천강까지 달려간 후 정주 즈음에서 기차로 갈아타서 중국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석탄간 위에서 꼬박 잠드는 바람에 기관사에게 들켜 끝내 잡히고 수용소에서 상당한 고생을 한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오자마자 다시 숙소의 군관 방에 숨어 2차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몇년이나 수용소에서 사상교화를 빙자한 고문을 당했고[9] 큰 고생을 하곤 교화소로 이동했다. 거기선 대접이 좀 나아서 비곗덩어리도 제공되었는데 이웃 죄수들과 대화하는게 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죄수들과[10] 수다를 떨며 정보를 얻다 걸려서 징계를 받는다. 눈에 띄게 형편없어진 식사에 저것들이 설마 나를 죽이려나? 싶어서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단식을 했다. 처음에 간수들은 그래봐야 당신이 손해다. 단식질 하다가 나중에 빌던 놈 많다, 나중에 그쪽에서 밥달라고 애원할걸?이라고 비웃었지만 6일을 내리 굶은 신상옥이 똥오줌을 싸고 기절하자 온 교화소가 발칵 뒤집혔고 정치보위부장[11] 김병하가 달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너희들도 죽는다!"라고 길길이 날뛰어 그를 의무실로 옮겨 그때부턴 잘 대우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신상옥의 '반성문'을 접수한 다음에 그를 풀어주어 최은희와 재회하게 한다.

이후로 이들은 북한에서 재결합했고, 부부는 매우 대접을 잘 받아 최은희의 경우에는 납치된 직후에 심지어는 아무나 못 간다는 김정일 생일파티에 김정일 본인이 초대해줬다고. 당시 김정일은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아버지 김일성에 못지 않은 최고의 실권자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생일파티에는 북한에서도 엄청난 상류층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었다. 최은희의 감시원인 강해룡과 김학순은 자기들도 아직 못가본 자리라고 엄청나게 부러워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시 7세였던 김정남과 성혜림까지 만났으며, 최은희가 김정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감히 자신의 이름을 묻는 사람을 처음 본 김정남이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남의 이름을 다 물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꽁무니를 빼자 곧바로 김정일이 "어른이 말씀하시면 예 저는 누굽니다 이렇게 대답하는거야."라고 타일렀다고.

이렇게 환대를 받고 김정일과 가깝게 지냈다 해도[12] 가족들이 한국에 있는 마당에 억지로 끌려와서 경험하게 된 북한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우선 탈출 우려 때문에 늘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고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없다고 여겨지면 제거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최은희는 이동만 시켜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였다. 또한 사상 교육과 개조를 한다며 주체사상과 김일성 교시 등을 교육시켰는데 이걸 수시로 받는것도 고역이었다.

최은희는 밤 11시에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13] 자신의 실종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라디오 진행자[14]가 울먹이며 "언니, 어디 있어?"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수도꼭지를 틀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에 끌려온지 5년이 지난 후에야 김정일의 주선으로 재회하게 되는데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너무도 어색하게 서로를 쓸어안았다. 신상옥 감독은 만약 자기 배우들이 그랬으면 화 내면서 컷 외쳤을 동작이라고 했다.[15] 파란만장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상옥 감독이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북한에 똑같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모든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16]

여차저차 하던 와중에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납치했던 김정일의 권유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리게 된다. 애초에 김정일은 문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17] 영화분야를 발전시키고 싶어 이들을 납치했다고.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받은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고 몇 년 후에 북한에서 신필름을 차리게 된 것인데 참 여러 가지로 영화같은 이야기.

사실 분단 당시에 많은 문화예술 인력들이 당대 연예인들이나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우가 그야말로 형편이 없었고, 딴따라, 저급문화라며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어 공산주의 사상에 감화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북한이 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었던지라 인재풀 자체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풍부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차츰 차츰 권력을 강화했고 대중문화 부분에 있어서 그야말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일일이 간섭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승희, 안막, 임화처럼 정치투쟁에 휘말려 숙청된다든가 백석이나 심영처럼 중앙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당하거나 하방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또한 그 과정에서 소재제한도 강화되었는데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이 한직으로 내몰리거나 예술계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소재제한을 의식해 연극과 영화, 노래, 소설, 만화, 드라마 등을 만들었고, 결국 문화예술 부분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다. 실상 따지고보면 남한도 영화나 만화, TV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기는 했고 실제로도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이 끊기거나, 배우들이 강제로 반공영화, 반공드라마에 출연시킨다 하는 등 온갖 말도 안되는 전횡들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지만 국가에서 배우와 작가들의 일거리를 보장해주지는 않았기에 어떻게든 벌어먹을 방법을 찾아야했고, 또한 북한이 검열의 끝판왕급이었던지라 그나마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했기는 했다. 여하튼 북한의 김정일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력하지 않는 북한의 예술 관련 인민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하고 경쟁하는 예술인들이 더 뛰어나더라"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게 된다.[18] 분명 깨닫기는 잘 깨달았는데 갈수록 더 막장을 만들었지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에 두 부부를 일찍이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19]

신상옥 감독과 한국 언론에서는 김일성에게 바치기 위해 최은희를 납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최은희도 이미 50대, 김일성 역시 칠순을 앞둔 노인이었다. 애초에 기쁨조가 있는데 뭐….[20] 김정일은 오히려 최은희를 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모셨으며[21] 최은희의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최은희씨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니까"라며 자기성찰 개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신상옥 감독에게는 '내가 최 여사를 아버지한테 바치려고 데려왔다는 소문이 돈다던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이 최 여사를 돌려드립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한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을 출품, 그 외에도 '춘향전', '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22] 하에 제작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작품은 당대 북한 영화계 기준으로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이거나 참신한 영화들이었기에 북한 인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도 흡족해할만큼 작품성도 뛰어난 작품들도 찍어서 해외영화제에서 상도 타게 된다.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고… 이러던 와중에 런던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영화배우 남궁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23]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측 감시원들에게 신뢰를 주고 훗날 계획해둔 탈출을 쉽게 하기 위해 남궁원에게 북한 체제 찬양과 김일성의 찬양을 했다고.[24] 이렇게 북한에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한편 한국 정부는 체제경쟁, 보도통제 등의 명목으로[25]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납북 6년 후인 1984년 4월 2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사라진 후 난데없이 북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지금 예를 든다면 박찬욱이나 이영애가 실종되었다가 6년만에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게 공개된 것이나 같은 일, 사실 박찬욱이나 이영애 이상으로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신상옥 최은희의 비중은 컸다.

이 때 증거로 제시된 건 두 사람이 북한의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육성 테이프 그리고 자필 편지였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이 미국 입양(혹은 유학)을 미끼로 신상옥의 두 아들을 해외로 유인 납치하기 위해 두 사람을 사주해 조총련과 연계된 일본인을 통하여 서울로 사진 등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실 그 일본인은 멀쩡한 교도통신 기자 에노키 아키라(榎彰, えのき あきら)로 신상옥의 지인이었으며, 우리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북한에 살게 됐다는 암묵적인 언질까지 서울의 가족들에게 넌지시 전해준 상태였다.[26] 즉 신상옥은 북한의 추가 납치 공작을 역으로 이용해 부부가 함께 납북되었음을 전세계에 공표한 셈. 이쯤 되면 무서운 사람이다. 

5. 탈출 과정[편집]

1986년 3월 13일에 영화 촬영과 관련하여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을 방문하던 중 미국 대사관으로 기습 입장하는데 성공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한다.[27]

신상옥은 앞서 언급한 에노키 아키라에게 빈에 갈 것이라고 알렸으며 점심 약속을 핑계로 불러냈다. 그리고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에노키 기자가 탄 택시가 도착하자 같이 동승하여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확인한 이들은 택시 기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방향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에노키 기자에게 자신들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당했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빈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쳐나와 뒤도 안돌아 보고 미국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28] 이렇게 망명에 성공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였다. 바로 한국으로 갔다간 워낙 북한과 지척이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추격자나 스파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고도 한다. 또한 북한의 이름으로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여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아서 한국에서는 이들이 배신,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또는 영화사 허가 취소를 받은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를 찾을 목적 겸 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납북수기에서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라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말 그대로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한 이 부부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택해서 북한의 암살공작원들이 자신들을 해코지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한국 정부(정확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자신들을 북한의 영화 발전에 기여하고 동조했다면서 추궁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걱정들을 영화처럼 일거에 날린다. 실제로 안기부는 훗날 신상옥 감독을 취조하면서 무조건 그가 자진 월북했다고 멋대로 결론 짓고 "십수년 전 홍콩에서 머문 호텔 방번호를 불어라!" 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심문을 했고 신상옥 감독이 써낸 탈출기는 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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