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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사랑의 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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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804회 작성일 22-12-2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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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12년 SBS 궁금한 이야기 Y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진 장애인 인권유린 사건.

2. 원주 사랑의 집?[편집]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1]에 위치한 '하나님의 복지법인 사랑의 집(이하 사랑의 집)' 대표 장진남 씨[2]는 1964년부터 장애인 23명을 입양하여 친자식처럼 돌보고[3] 장애인 복지에 힘써온 '천사 아버지' 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원래 장씨는 1940년[4] 평안북도 신의주시 출신 실향민으로, 어릴 적에 월남했다고 한다. 1964년, 해병대 제대 이후[5] 대구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한 장애아를 데려다가 기른 것을 시작으로 미혼 상태로 정관수술을 한 뒤 점차 장애아를 한두 명씩 모아다 기르게 되었고, 1970년경부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현 강서구)[6] 방화1동 249-45 공터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터를 잡다가 1973년부터[7] 어머니가 사들인 내발산동 419-1번지의 야산 인근에 있는 폐가를 개조하여 정착한 뒤 장애아를 돌보면서 주로 미국 등지로 몇 차례 부흥회를 다니거나 흑염소를 키워 육골즙을 만드는 등 생계 활동을 해오다가 1979년 이후 수 차례 언론을 타면서 유명세가 더해졌고 사랑의 집을 후원하는 후원자들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8] 심지어 1988년에 자서전 <주님의 손처럼 되고 싶어라>도 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경부터 사랑의 집 일대 토지가 서울 남부지역 개발 붐으로 땅값이 올라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고 장씨도 사랑의 집 증축을 위해 땅을 측량하다가 사랑의 집 인근 땅에 남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후 갑자기 나타난 땅 주인들과 갈등을 겪다 땅 주인들이 경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장씨는 1986년에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의해 연행되어 신길동 분실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뒤 땅 주인들에 의해 온갖 방해와 협박을 당하다 1989년에는 전술한 자서전에 땅 주인들 이름을 실명으로 기재하는 바람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90년에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어 돌아와 보니 내발산동 사랑의 집은 이미 1989년 10월 6일부로 강서구청의 행정대집행에 의해 철거되었고(사유는 불법건축물 판정과 장애자복지법 위반), 장애인들은 당시 서울시립아동병원이나 장애인 시설 등으로 보내졌다. 장씨는 이들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병원측에서 거액의 치료비 및 식비 등을 내야만 한다고 하자 결국 주머니 사정상 5명의 장애인들을 겨우 찾아 지리산, 월악산 등지를 떠돌면서 약초를 캐며 원시인과 다름없이 유랑생활을 하다가[9] 1996년경에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 산골에 터를 잡으며 2년 뒤에 새 집이 지어지자 이곳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3. 실상[편집]

2012년 후술할 SBS <궁금한 이야기 Y>를 통해 장씨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애시당초 장진남 본인부터가 직함만 달고 있을 뿐인 가짜 목사였으며[10], 그가 운영한 해당 시설도 인가받지 않은 미신고시설이었다. 그는 사망한 원생 두 명[11]의 시체를 10여 년이 넘도록 영안실 냉동고에 방치한 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게 했으며 죽은 사람들의 사망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부당하게 장애인 수당을 챙기고 있었다. 장씨 측의 주장에 의하면 이 두 원생이 병원 측의 의료사고로 인해 죽었다며 시신을 회수하지 않은 것이다.[12]

게다가 사랑의 집에 있던 다른 원생들은 하나같이 기본적인 끼니[13]조차도 챙기지 못한 듯한 학대의 흔적이 역력한 데다 장씨는 이들을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밭에서 강제로 노동을 시키고 심지어 삭발을 시키고 몸에 그들의 이름[14]과 전화번호[15] 등을 문신으로 새기기까지 하는 등 원생들에게 보인 행동은 도저히 '천사 아버지' 로 불리던 인물이 할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심지어 폭행 당해 피를 흘리고 있는 장애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사진으로 찍어 남기기까지 했다. 이에 장씨 측은 해당 사진이 1998년 당시 귀래면사무소 공익요원 측이 시설 내의 간이 변소를 무허가 건물이라고 하여 철거했는데, 그 원생이 철거 잔해에 걸려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곳의 장애인들은 모두 친부모가 있음에도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워 가족이 제대로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맡겨진 사람들이었는데, 장씨는 이들을 입양해서 친권자가 된 뒤 엄청난 뒷돈을 챙겨왔다. 장씨의 호적에는 21명이 올라와 있었지만, 정작 실제 남아있는 자녀 수는 고작 4명에 불과했다. 1989년에 내발산동 사랑의 집이 강제철거되자 동거했던 장애인들은 서울시립아동병원을 거쳐 각지의 장애인 시설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후 장씨가 5명을 겨우 찾아냈으나 그 중 두 명은 2000, 2002년에 각각 병원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2012년 당시에 거주하던 4명 중 나머지 한 명은 2000년에 다른 시설에서 되찾아 데려온 것이다.

거기에 4명을 21명으로 불린 수법도 가관인데 사진을 조작해서 사람 수를 늘린 것도 모자라[16] 한 명의 주민등록번호를 2중으로 등록해 1인 2역을 시키는 등 온갖 치졸한 수법을 동원했으며, 심지어 여성 원생을 입양한 후 호적에 아들로 등록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7] 이렇게 21명이라는 '양자'를 유지해서 기초생활수급비 및 장애인 수당 등 국가 보조금만 무려 2억 원에 후원금만 5억 원 상당의 어마어마한 액수를 챙긴 것이다. 내발산동 시절 장씨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방송에 의해서 양말부터 억대의 돈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매스컴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진상이 드러나다[편집]

결국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제보를 받아 취재를 시작했고, 이 방송을 통해 사랑의 집의 실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첫 번째 르포는 2012년 6월에 방송되어 큰 파장을 불렀다. 방송을 본 많은 시청자들이 공분했고, 일부 시청자들은 장애인 인권 유린이라는 측면에서 과거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연상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사회복지 측면에서도 불과 1년 전인 2011년 발생한 원주 자신보육원 사건에 이어 같은 원주 지역에서 터진 사건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두 번째 취재에서는 장애인 가족들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등 장애인 단체들이 앞장서서 사랑의 집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장씨 부부[18]는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오히려 취재진을 '채증'하겠다며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댔고[19] 시종일관 고성과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심지어 사랑의 집에 있던 장애인들의 친부모와 장애인 단체가 가져온 유전자 검사결과 등 각종 관련 서류마저 '이거 다 가짜다'라면서 그들 앞에서 서류를 갈기갈기 찢는 등 실로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여 공분을 샀다.[20] 게다가 장씨는 취재진과 경찰, 검찰, SBS 제작진, 장애인 단체들, 자신을 비판하는 일부 블로거들에까지 주거침입, 납치, 유괴 등 온갖 혐의를 뒤집어씌워 고소하기에 이른다. 한 술 더 떠 장씨의 아내는 경찰과 취재진, 장애인 단체 등을 향해 '폭도'를 비롯해 '강도', '악마' 운운하며 온갖 폭언과 욕설, 저주를 서슴치 않는 등 추악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또한, 보호자들이 원생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몰래 데리고 나와 병원으로 옮겼는데 이 인간말종은 기어코 찾아와 원생을 데려가겠다며 발악을 했다. 다행히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친부모 등 보호자들 편이라 속여서 돌려보내버렸고 치료를 받았는데 이 중 놀라운 사실은 원생 중 한 명이 말을 잘 못 알아 듣길래 청각 장애인인 줄 알았다가 알고 보니 귀 안에 귀지가 많이 있어서 그걸 다 하루 내내 파내야 할 정도로 원생들의 위생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21].

게다가 경찰과 원주시 당국 역시 태도도 소극적이었는데, 막상 사랑의 집 앞에 경찰이 출동하자 "체포영장이 나올 때까지 못 들어간다."고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사랑의 집에서 장애인 4명이 무사히 구출되었음에도 "살아만 있어주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또 시 당국 역시 사랑의 집이 시설이 아닌 '가정'으로 취급돼 있는 터라 그 동안 별 제재를 못했다. 다만 경찰은 초기부터 사랑의 집 사건에 대해 증거가 확보되는 대로 적극적으로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제작진, 장애인 인권단체, 친부모 등 보호자들과 함께 경찰서 청사 내부에서 원생들을 몰래 탈출시켜 주기도 했다.

이후 한 차례 더 방송이 나간 다음, 장장 6개월 동안의 진실 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장애인 단체와 인권단체가 장씨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급기야 많은 시민들도 법원과 공공 기관에 모여서 대규모 집회를 열 정도로 조직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힘입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SBS의 취재 내용을 증거로 채택하여 조사를 시작했으며 검찰도 사랑의 집을 압수수색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장씨가 이런 사태를 대비해 미리 손을 쓴 것인지 마당에서는 각종 서류 등을 불태운 흔적이 발견되었고[22] 개 뼈 조각도 발견되었다.[23]

5. 그 이후[편집]

2012년 12월 장씨는 구속되었지만 췌장암을 핑계로 진술을 거부하는 데다[24] "배정훈[25]이 3억 원을 달라는데 안 줘서 그러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26]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비리에 연루된 높으신 분들이라도 된 양 휠체어까지 타고 나타나는 패기를 보였다. 심지어 사랑의 집 측에서는 기존 누리집을 긴급 개편하여 '방송사가 조작했다' 등을 주장하며 필사적으로 장씨를 옹호하며 무죄를 주장해 왔으나 대중들은 당연히 싸늘한 시선을 보내왔다. 장 씨는 그 뒤에도 수년간 여러 차례 언론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청와대 등지 각계 단체들에 억울함을 주장하는 진정서를 보내고, 2020년에는 배 PD에게 내용증명을 보내는 등 자신은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8년 기존 누리집 대신 'http://억울한옥살이.com'[27]을 개설하고 이듬해 원래 주소로 누리집을 바꾼 뒤 억울한 옥살이는 SBS와 Y를 비난하는 사이트로 변경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에 배정훈 PD도 2016년 트위터에서 타 블로그에 올려진 그의 글 링크를 올리며 분노를 표했다. 2021년에 장씨는 법원에 재심청구까지 한 상태다.

보다못한 한 누리꾼이 방송을 보고 2013년 2월 8일 다음 아고라에 서명을 올렸는데, 서명운동 제목이 장애인 21명을 입양 학대한 희대의 사기꾼을 역사가 심판해야 한다라는 것에서 누리꾼의 심정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28]

한편 사랑의 집에 있던 원생들은 다른 장애인 시설로 옮겨가 생활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원생 중 한 명인 장성아 씨는 사랑의 집을 나온 이후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았고[29] 병세가 점점 악화된 끝에 결국 2013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에 반해 장씨는 여전히 아내와 지인들을 동원해 자식들을 찾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30].

2013년 2월에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장씨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다. 심지어 법원에 특별변호인까지 신청했고 보석 신청도 계획했다고 한다. 결국 춘천지법 원주지원 1심 재판부는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했으나 일부 진술은 장애인의 지적 능력을 감안해 신빙성이 낮다는 이유로 기각했으며 결국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책위는 판결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면서 항소했지만, 2014년 1월 8일 춘천지법 항소심, 5월 16일 대법원도 같은 판결(2014도1188)을 내렸다.

2013년 7월 26일에 24년 전 내발산동 사랑의 집 강제철거 당시 다른 원생들과 시설로 같이 옮겨졌던 한 원생이 경기도 이천의 한 시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13년 9월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정도로 엽기적인 홍천 실로암 연못의 집 사건이 그것이 알고 싶다(#910)에서 고발되었다.

2019년 10월에는 유튜브 계정을 개설하고 과거 영상까지 올려가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데, 글쎄올시다... 그 와중에도 췌장암 운운하는 양반이 10년 가까이 멀쩡하게 잘 살아있다.

6. 후속 보도와 이어진 증언[편집]

위 내용에 관한 방송 이후 내발산동 시절 15살 때 5번만에 탈출한 원생이 수십 년 세월 뒤에 부모와 재회 후 이어지는 증언으로 시작되는 후속 프로가 2013년 4월 12일에 방영되었는데 그 증언에 따르면 더 충격적인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 그는 장씨 부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4번이나 시도했다가 팔의 문신 탓에 장씨에게 붙잡혀 욕조에 강제로 빠지며 짓밟히는 방법의 물고문을 당하고, 손발톱을 뽑고 눈을 바늘로 찔리는 가혹행위를 당했다. 고문 수준의 학대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원생의 증언에 따르면 원장이 안마를 시킨다는 이유로 한 여성 원생[31]을 데리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정황상 성폭행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만일 이게 사실이었다면 이건 도가니 2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리고 이 증언으로 인해 결정적인 것이 드러났는데 학대를 견디지 못해 숨진 원생만 6명[32]이라고 하고 이 6명은 당시 사랑의 집이 있던 강서구 발산동 구 사랑의 집 인근 야산에 암매장되었다고 한다.

암매장된 지역을 포함한 구 사랑의 집 일대는 전술한 대로 1989년에 강서구청 행정대집행에 따라 철거된 이후 빈 땅으로 남다가, 2004년 발산택지재개발에 따라 SH공사에서 지은 마곡수명산파크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33] 암매장된 자리는 그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부지라고 한다. 유골의 행방을 찾을 수는 있었으나 이미 시공업체에서 유골을 발굴한 이후 무연고 변사자 시신으로 한 사찰에 화장을 요청했기 때문에 정확한 DNA 감식이 힘들어 안타깝게도 저 6명의 신원을 확인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이 방영분을 위해서 제작진들은 해당 원생의 증언을 기반으로 재연극은 물론,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구 사랑의 집을 재현한 세트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방송 중 장씨 측 변호인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도의적인 책임은 있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도저히 용납 못할 아버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34]

2013년 9월에 경향신문에서 사랑의 집 원생들의 근황을 알려주는 기사가 실렸다. 원생 4명은 모두 구출되었으며 지금은 시설에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악몽을 꾸는 등 정신적 트라우마가 심각했으며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실제로 장씨의 부인은 친권을 주장하며 이들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서울가정법원에 친권 파기 소송을 진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성인인데도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관할 면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조차 받지 못했다.

2014년 1월 23일에는 그동안 병원 냉동고에 안치되어 있었던 원생 장성희 씨의 장례가 12년만에 치러지고 추모제가 열렸다.(#1) 7월 2일 서울가정법원의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사실상 장씨의 친자가 아님을 인정하였다.(#2) 장씨는 이에 항소했으나 2015년 5월 14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장씨의 상고를 기각하여 친생자관계부존재를 확정했다.

2015년 7월 31일에 사랑의 집의 맏형이었던 이성민(장성민) 씨가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광주지역의 장애인 극단 '그래도'에서 제작한 <행복한 동행>이라는 제목의 연극은 이 사건 피해자의 주변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2021년 3월 8일, 44년전 내발산동 시절에 맡겨졌던 강미정(추정 나이 47세, 입소 후 이름은 장성미)씨를 찾는다는 기사가 실렸다. 

7. 관련 문헌[편집]

  • 원주 사랑의 집 사건 백서 - 장애우문제연구소 홈페이지 개편으로 삭제돼 볼 수 없지만, 마지막에 배정훈 PD가 시를 남겨서 안타까움과 일반인들의 무관심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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