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 불륜처 살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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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415회 작성일 23-01-13 16:56본문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1965년 6월 13일 오전 9시 2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창동 75번지 세검정 만하장(萬河莊) 관광호텔[2] 뒷산 중턱 밤나무숲속에서 동대문구 전농동 530번지에 거주하던 이문휘(李文徽, 당시 34세, 상업)가 식칼로 아내 유옥순(兪玉順, 당시 28세)[3]의 어깨와 등, 가슴 등 3곳을 찔러 살해한 뒤, 자신도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황해도 연백군이 고향인 이 씨는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라나 성격은 내성적이면서 온순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월남하여 곧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였고, 1955년경 상사로 강원도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유 씨의 고향인 영월군에서 유 씨와 만나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1958년 제대한 뒤에는 유 씨와 함께 상경하여 전농동 486번지에 '신신(新新)집'이라는 주점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자식들을 꼭 음악가로 만들겠다는 결심과 함께 10년간 줄곧 부부로 지내오면서 열심히 노력하였고, 3년 전부터는 살림도 다소 나아진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이 씨 부부는 1년 전인 1964년 여름부터 진해해군병원 보일러실에 근무하던 이태종(李泰鍾, 당시 30세) 대한민국 해군 중사를 한 집에 하숙시켜 왔는데, 별안간 이 중사는 유 씨와 눈이 맞아 결국 간통을 저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며 여러 차례 간청과 설득을 반복하며 아내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유 씨는 1965년 5월 27일 종로구 세종로에 있던 B모 다방에 '마담'으로 들어갔고, 그해 6월 11일부터는 아예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 뒤 사건 전날인 12일 오후 5시, 이 씨는 아래와 같이 장문의 유서 4장을 미리 써서 바지 뒷주머니에 간직하고 식칼을 품은 뒤 식모에게 '아이들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고는 아내가 일하는 다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인 6월 13일 아침 8시 20분쯤 다방으로 찾아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으로 돌아오라 타일렀지만 유 씨는 남편 이 씨도, 내연 관계의 이 중사도 누구도 따를 수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결국 이 씨는 택시를 이용해 아내를 세검정 부근으로 유인해내어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던 것이다.
이 씨는 미리 준비한 유서에 '어린 자식 넷을 두고 나가버린 바람난 처를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참된 아내로 되돌아 올 것을 애원했으나 허사, 이제 그 여자 없이는 내 행복이 있을 수 없어 열 번 생각 끝에 무서운 범죄를 저지릅니다. 부디 어린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길…' '불쌍한 어린 아이들은 죽일 수 없군요. 뜻 있는 분은 영신(永信, 당시 10세, 전농국민학교 3학년)·규홍(圭弘, 당시 8세, 전농국민학교 1학년)·규하(圭何, 당시 7세)·규남(圭南, 당시 5세) 이 4남매를 외국인에게 입양시켜 주십시오'라고 썼다.
사건 직후 이웃아주머니가 4명의 고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황해도 연백군이 고향인 이 씨는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라나 성격은 내성적이면서 온순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월남하여 곧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였고, 1955년경 상사로 강원도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유 씨의 고향인 영월군에서 유 씨와 만나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1958년 제대한 뒤에는 유 씨와 함께 상경하여 전농동 486번지에 '신신(新新)집'이라는 주점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자식들을 꼭 음악가로 만들겠다는 결심과 함께 10년간 줄곧 부부로 지내오면서 열심히 노력하였고, 3년 전부터는 살림도 다소 나아진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이 씨 부부는 1년 전인 1964년 여름부터 진해해군병원 보일러실에 근무하던 이태종(李泰鍾, 당시 30세) 대한민국 해군 중사를 한 집에 하숙시켜 왔는데, 별안간 이 중사는 유 씨와 눈이 맞아 결국 간통을 저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며 여러 차례 간청과 설득을 반복하며 아내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유 씨는 1965년 5월 27일 종로구 세종로에 있던 B모 다방에 '마담'으로 들어갔고, 그해 6월 11일부터는 아예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 뒤 사건 전날인 12일 오후 5시, 이 씨는 아래와 같이 장문의 유서 4장을 미리 써서 바지 뒷주머니에 간직하고 식칼을 품은 뒤 식모에게 '아이들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고는 아내가 일하는 다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인 6월 13일 아침 8시 20분쯤 다방으로 찾아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으로 돌아오라 타일렀지만 유 씨는 남편 이 씨도, 내연 관계의 이 중사도 누구도 따를 수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결국 이 씨는 택시를 이용해 아내를 세검정 부근으로 유인해내어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던 것이다.
이 씨는 미리 준비한 유서에 '어린 자식 넷을 두고 나가버린 바람난 처를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참된 아내로 되돌아 올 것을 애원했으나 허사, 이제 그 여자 없이는 내 행복이 있을 수 없어 열 번 생각 끝에 무서운 범죄를 저지릅니다. 부디 어린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길…' '불쌍한 어린 아이들은 죽일 수 없군요. 뜻 있는 분은 영신(永信, 당시 10세, 전농국민학교 3학년)·규홍(圭弘, 당시 8세, 전농국민학교 1학년)·규하(圭何, 당시 7세)·규남(圭南, 당시 5세) 이 4남매를 외국인에게 입양시켜 주십시오'라고 썼다.
사건 직후 이웃아주머니가 4명의 고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