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자 연쇄 독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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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795회 작성일 23-01-09 15:50본문
1. 개요[편집]
2. 사건 경과[편집]
2.1. 사건의 시작[편집]
1986년 10월 31일, 그녀는 이웃집에 살던 친구이자 계모임의 회원이었던 49세 여성 김계환에게 목욕탕에 가자고 제안했고, 둘은 신당동에 위치한 한 목욕탕에 방문한다. 그런데 김계환이 탈의를 하던 도중 김선자가 건넨 음료를 마신 뒤 이내 심한 경련과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사망한다. 이후 사인은 독극물 중독으로 밝혀졌으며, 김선자는 그 사이 목걸이와 반지 등 패물을 가로챘다.
당시 유족들은 이웃에 사는 김선자가 함께 목욕하러 가자고 했고, 가지고 있던 귀중품이 사라진 게 이상하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김선자는 이를 부인했고 별다른 증거가 없었다.
1987년 4월 4일, 그녀는 대담하게도 시내버스 안에서 일을 벌였으며, 50세 여성 전순자가 독극물 중독으로 버스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그녀는 이전의 목욕탕에서 사망한 김계환과 같이 김선자와 함께 계를 하는 회원이었고, 김선자는 그녀에게 약 700만 원 가량의 빚을 진 상태였다. 김선자는 전순자에게 영등포에서 돈을 받을 일이 있으니 동행을 권유하였고, 그렇게 영등포 방면 버스를 타고 이동 중 김선자가 건넨 음료를 마시고 사망하게 된다. 처음엔 외상이 전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심장마비로 인한 돌연사 정도로 여겨졌지만 부검을 해본 결과 치명적인 독극물 성분이 검출되었고 이때부터 김선자는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1988년 2월 10일, 김선자는 쌓여가는 빚 독촉에 지쳐 가깝게 사는 46세 여성 김여인[2]에게 접근하여 오늘 불광동에서 채무자에게 돈을 받을 것이 있으니 나와 함께 채무자를 보러 가자고 한다. 김여인은 김선자에게 받을 돈이 120만원이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준다는 김선자의 말을 믿고 따라 나섰지만, 나타난다는 채무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당시 김여인은 김선자가 건넨 율무차를 마셨다가 계속 구토를 했다.
이후 김선자와 함께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탄 김여인은 구토 증세로 힘들어 했고, 김선자는 음료수를 마시면 괜찮아 질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의심스러웠던 김여인은 김선자가 음료를 구입하기 위해 잠시 택시에서 내린 사이 차를 그대로 출발시키면서 살인미수에 그쳤다. 그 뒤 김선자는 다시 김여인의 집에 방문해서 120만원을 김여인에게 갚은 뒤, 그녀의 안부를 챙겼다고 한다.
당시 유족들은 이웃에 사는 김선자가 함께 목욕하러 가자고 했고, 가지고 있던 귀중품이 사라진 게 이상하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김선자는 이를 부인했고 별다른 증거가 없었다.
1987년 4월 4일, 그녀는 대담하게도 시내버스 안에서 일을 벌였으며, 50세 여성 전순자가 독극물 중독으로 버스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그녀는 이전의 목욕탕에서 사망한 김계환과 같이 김선자와 함께 계를 하는 회원이었고, 김선자는 그녀에게 약 700만 원 가량의 빚을 진 상태였다. 김선자는 전순자에게 영등포에서 돈을 받을 일이 있으니 동행을 권유하였고, 그렇게 영등포 방면 버스를 타고 이동 중 김선자가 건넨 음료를 마시고 사망하게 된다. 처음엔 외상이 전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심장마비로 인한 돌연사 정도로 여겨졌지만 부검을 해본 결과 치명적인 독극물 성분이 검출되었고 이때부터 김선자는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1988년 2월 10일, 김선자는 쌓여가는 빚 독촉에 지쳐 가깝게 사는 46세 여성 김여인[2]에게 접근하여 오늘 불광동에서 채무자에게 돈을 받을 것이 있으니 나와 함께 채무자를 보러 가자고 한다. 김여인은 김선자에게 받을 돈이 120만원이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준다는 김선자의 말을 믿고 따라 나섰지만, 나타난다는 채무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당시 김여인은 김선자가 건넨 율무차를 마셨다가 계속 구토를 했다.
이후 김선자와 함께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탄 김여인은 구토 증세로 힘들어 했고, 김선자는 음료수를 마시면 괜찮아 질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의심스러웠던 김여인은 김선자가 음료를 구입하기 위해 잠시 택시에서 내린 사이 차를 그대로 출발시키면서 살인미수에 그쳤다. 그 뒤 김선자는 다시 김여인의 집에 방문해서 120만원을 김여인에게 갚은 뒤, 그녀의 안부를 챙겼다고 한다.
2.2. 가족들의 사망[편집]
1988년 3월 27일에는 김선자의 아버지인 73세 남성 김종춘이 김선자와 함께 친척의 환갑 잔치에 방문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아버지가 고령자인 것을 고려해 당시 법의학 지식이 없던 의사들에 의해서 노인성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진 것으로 마무리가 된 뒤 화장되었다. 이 사건도 딸 김선자가 건넨 건강음료를 마시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화장된 유골에서 독살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아버지에게 돈을 빌렸거나 유산 상속 등의 살해 동기가 미미했던 점을 들어 이 건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판결되었다.
4번째 범행이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4월 29일에는 그녀의 동생인 43세 여성 김문자 역시 아버지처럼 같은 변을 당했으며, 독극물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심장마비로 처리되었다. 김선자는 동생 김문자에게 약 천만원의 빚을 지고 있던 상태였고, 여동생이 사망했음에도 동요하거나 슬퍼하는 내색 없이 사망 확인 후 여동생의 집을 뒤져 금품 및 귀금속 등을 털어갔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김선자와 함께 여동생을 병원에 데려간 청년들의 증언에 따르면, 옆자리에 있던 김선자의 여동생이 버스 안에서 쓰러지자 김선자와 함께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에서 여동생이 위독하니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자 갑자기 김선자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여동생의 생명을 구하는 일엔 아랑곳도 없이 여동생의 핸드백을 가지고 황급히 나가버리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 청년들이 황당했다고 한다. 이후 약 3개월 뒤인 8월 8일에 조카인 46세 여성 손미림도 같은 변을 당했다. 김선자의 조카인 손미림은 김선자의 소개로 집을 사기 위해 현금 480만원을 들고 그녀를 만났다고 한다.
4번째 범행이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4월 29일에는 그녀의 동생인 43세 여성 김문자 역시 아버지처럼 같은 변을 당했으며, 독극물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심장마비로 처리되었다. 김선자는 동생 김문자에게 약 천만원의 빚을 지고 있던 상태였고, 여동생이 사망했음에도 동요하거나 슬퍼하는 내색 없이 사망 확인 후 여동생의 집을 뒤져 금품 및 귀금속 등을 털어갔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김선자와 함께 여동생을 병원에 데려간 청년들의 증언에 따르면, 옆자리에 있던 김선자의 여동생이 버스 안에서 쓰러지자 김선자와 함께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에서 여동생이 위독하니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자 갑자기 김선자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여동생의 생명을 구하는 일엔 아랑곳도 없이 여동생의 핸드백을 가지고 황급히 나가버리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 청년들이 황당했다고 한다. 이후 약 3개월 뒤인 8월 8일에 조카인 46세 여성 손미림도 같은 변을 당했다. 김선자의 조카인 손미림은 김선자의 소개로 집을 사기 위해 현금 480만원을 들고 그녀를 만났다고 한다.
2.3. 검거와 조사, 그녀의 최후[편집]
5명을 독살한 혐의로 경찰에 검거된 김선자는 '증거를 대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는 등 온갖 소란과 발광을 했다. 그러자 검찰[3]과 경찰은 신당동 목욕탕 희생자 등 이미 묻혀 있는 시신 4구에 대해 부검을 결정했다. 경찰은 이미 장례가 끝난 시신을 유족들에게 어렵게 동의를 구하여 다시 부검했는데 시신 4구에서 청산염 성분을 검출했다. 이때 무덤 속 시신에 대한 부검은 유족이나 수사당국으로서는 극도로 피하고 싶은 일이었고, 당시 한국에서는 관을 쪼개고 무덤을 헤집는 부관참시(剖棺斬屍)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데다 소득이 없을 경우에 쏟아질 세간의 비난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중 4구의 시신 중 3구에서 청산염 성분이 검출되었다. 가장 먼저 사망한 40대 여성의 시신은 너무 부패한 탓인지 청산염 성분을 찾을 수가 없었고, 이미 사망한 아버지 김종춘의 경우 화장되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유골에선 청산염 성분을 찾을 수 없었다.
이어서 영장을 받은 그녀의 집을 압수수색한 경찰은 깜짝 놀랐는데, 그동안 그녀가 아버지, 동생, 친구 등을 살해한 후 훔쳐낸 물건들인 다이아몬드 반지, 수표, 통장 등이 쏟아져 나온 것. 참고로 살인 용의자의 몸수색을 위해 여성 경찰들이 동원되었다.[4] 이후 결정적인 증거는 다소 황당하게도 압수수색을 하던 여경이 김선자의 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발견되었던것이다. 당시 김선자가 거주하던 집은 일본식 가옥이었고 화장실이 목조였는데, 경찰이 화변기에 쪼그리고 앉자 화장실의 나무 기둥 뒤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였고, 그 구멍 안으로 손을 넣자 돌돌 만 신문 뭉치 하나가 잡혀 빼내어 펼쳐 보니 화공약품 회사에 근무하는 친정 조카로부터 "꿩을 잡는다."며 구한 밤알 크기의 청산염 덩어리가 숨겨져 있었다.
증거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자 김선자는 정식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선자는 재판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했으나, 이 청산가리가 결정적 물증으로 작용하였고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김선자는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으나 2심과 3심인 대법원에서도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김선자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9년 뒤인 1997년 12월 30일에 대전교도소에서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의 범인인 김용제, 김준영 순경 총기난동 사건의 범인 김준영 등을 비롯한 다른 장기 미집행 사형수 22명과 같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사실상 대한민국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다.[5]
처음에는 감옥에서도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했던 김선자는 60년대부터 사형수 교화 활동에 힘쓰던 삼중 스님을 만나 여러 차례 억울함을 호소했고, 실제로 그래서 삼중 스님은 김선자 사건의 재조사를 배명인 법무부 장관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증거가 빼박이라 다시 조사할 건덕지조차 없었으며 아버지와 여동생은 물론 친척 3명까지 살해한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다. 게다가 범인 김선자는 말 그대로 인간 말종인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범죄를 전혀 반성도 하지 않아 당시 그녀에 대한 여론의 공분도 매우 컸으며 대중이 그녀의 사형을 기뻐했기에 그녀가 비참하게 죽은 것이 자업자득이다. 삼중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김선자는 처형 직전 범행을 줄곧 부인하던 태도를 바꿔 아버지와 여동생을 살해한 것에 대해 자신의 사치욕을 꾸짖고 외면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하며,[6] 사형 직전 "부자가 부럽고 동시에 증오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그들처럼 태어나 마음대로 돈을 써보고 죽을 것이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가난하게 태어난 것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어서 영장을 받은 그녀의 집을 압수수색한 경찰은 깜짝 놀랐는데, 그동안 그녀가 아버지, 동생, 친구 등을 살해한 후 훔쳐낸 물건들인 다이아몬드 반지, 수표, 통장 등이 쏟아져 나온 것. 참고로 살인 용의자의 몸수색을 위해 여성 경찰들이 동원되었다.[4] 이후 결정적인 증거는 다소 황당하게도 압수수색을 하던 여경이 김선자의 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발견되었던것이다. 당시 김선자가 거주하던 집은 일본식 가옥이었고 화장실이 목조였는데, 경찰이 화변기에 쪼그리고 앉자 화장실의 나무 기둥 뒤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였고, 그 구멍 안으로 손을 넣자 돌돌 만 신문 뭉치 하나가 잡혀 빼내어 펼쳐 보니 화공약품 회사에 근무하는 친정 조카로부터 "꿩을 잡는다."며 구한 밤알 크기의 청산염 덩어리가 숨겨져 있었다.
증거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자 김선자는 정식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선자는 재판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했으나, 이 청산가리가 결정적 물증으로 작용하였고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김선자는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으나 2심과 3심인 대법원에서도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김선자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9년 뒤인 1997년 12월 30일에 대전교도소에서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의 범인인 김용제, 김준영 순경 총기난동 사건의 범인 김준영 등을 비롯한 다른 장기 미집행 사형수 22명과 같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사실상 대한민국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다.[5]
처음에는 감옥에서도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했던 김선자는 60년대부터 사형수 교화 활동에 힘쓰던 삼중 스님을 만나 여러 차례 억울함을 호소했고, 실제로 그래서 삼중 스님은 김선자 사건의 재조사를 배명인 법무부 장관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증거가 빼박이라 다시 조사할 건덕지조차 없었으며 아버지와 여동생은 물론 친척 3명까지 살해한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다. 게다가 범인 김선자는 말 그대로 인간 말종인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범죄를 전혀 반성도 하지 않아 당시 그녀에 대한 여론의 공분도 매우 컸으며 대중이 그녀의 사형을 기뻐했기에 그녀가 비참하게 죽은 것이 자업자득이다. 삼중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김선자는 처형 직전 범행을 줄곧 부인하던 태도를 바꿔 아버지와 여동생을 살해한 것에 대해 자신의 사치욕을 꾸짖고 외면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하며,[6] 사형 직전 "부자가 부럽고 동시에 증오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그들처럼 태어나 마음대로 돈을 써보고 죽을 것이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가난하게 태어난 것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3. 기타[편집]
- 라이프 온 마스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사건이 등장한다.
- 일본판 김선자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1960년의 '스기무라 사다메 사건'은 범행 동기가 빚을 갚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고, 독극물을 탄 음료를 사용했다는 점이 김선자와 같다. 다만 스기무라 사다메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김선자는 법정에서는 범행을 부인했지만[12] 위의 유언에도 나와있듯이 사형 당하기 직전에는 가난해서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짓이니 정당방위라고 변명하다가 죽었기에 여론의 공분을 크게 샀고 그녀가 사형에 처해졌을때 그녀의 사형을 기뻐하는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