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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석궁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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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372회 작성일 23-01-3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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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7년 1월 15일김명호 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서울고법 민사2부 박홍우 부장판사[1]에게 석궁을 쏘아 부상을 입힌 사건.

2. 사건 일지[2][편집]

  • 1995년
    • 1월 -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 대학별 고사 수학 출제 문제 오류 지적 및 시정 요구
    • 10월 - 부교수 승진 불합격 판정 후 지위 확인 소송 제기
  • 1996년 - 성균관대 재임용 탈락 확정
  • 1997년 - 부교수 지위 확인의 소 항소 / 상고 기각
  • 2005년
    • 3월 - 교수 직위 확인 소송 제기
    • 9월 - 교수 지위 확인의 소 기각
  • 2007년
    • 1월 15일 - 판사 석궁 테러 사건 발생
    • 10월 15일 - 징역 4년 선고
  • 2007년 11월 ~ 2008년 3월 - 석궁 사건 항소심 1~5차 공판
  • 2008년 6월 12일 - 대법원 석궁 사건 상고 기각
  • 2011년 1월 24일 - 만기 출소

3. 사건 배경[편집]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선 사건의 배경이 되는 2개의 사건을 알아보아야 한다.

3.1. 성균관대 본고사 문제 사건[편집]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졸업 후 1988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명호는 1991년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95년 1월 본고사에 출제된 수학문제[3]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한 후 승진에서 탈락하고 중징계를 받은 데 이어 1996년 2월에는 재임용에서 제외되었다.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 씨는 성균관대학교 측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심과 2심에서 연달아 패소하였다. 당시 학교 측은 해교(학교에 해를 끼침) 행위와 연구 소홀 등을 재임용 탈락 사유로 들었으나, 본인은 "출제 오류 지적에 대한 보복으로 학교 측이 자신을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8년 이민을 떠난 김 교수는 뉴질랜드와 미국(2001년 재이민) 등에서 무보수 연구교수를 지냈다.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내가 베이비시터 등 궂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3.2. 교수지위 확인 소송 사건[편집]

3.2.1. 사건 개요[편집]

2005년 3월 귀국한 김 씨는 다시 ‘교수지위 확인 소송’을 냈다. 그 해 1월 개정된 ‘사립학교법 및 교육공무원법’이 ‘재임용이 거부된 교원은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재심청구나 법원소송 제기도 할 수 있다’고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1심 재판부는 “입시 오류 지적에 대한 보복으로 재임용을 거부당했다고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해 학교가 재량권을 남용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또다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패소 판결을 받은 김씨는 변호사도 없이 홀로 즉각 항소했고 대법원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서울고법 민사2부(당시 박홍우 부장판사, 주심 이정렬 판사) 역시 2007년 1월 12일 김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4월 17일, 김 씨는 '2006 형제24637 사건에 대한 맞고소 및 국제적 망신, 성대 입시부정 은폐방조하는 판사들 고소(직무유기 또는 직권남용)'라는 제목으로 재판관들을 향한 고소장을 냈으며 <20년간 양심적인 교수들을 대학에서 축출한 대법원의 재임용법 해석의 문제점>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서 국회 법사위원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3.2.2. 수학계의 시각[편집]

수학계에서는 김 씨의 재임용 탈락에 대해 ‘올바른 문제제기를 했는데도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당시 전국 44개 대학 수학과 교수 189명은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성균관대에서 제시한 ‘모범답안’은 문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김 씨의 이의 제기는 정당했으며 이를 둘러싼 갈등이 인사에 영향을 미쳤다면 매우 잘못됐다.”라는 내용의 연판장을 당시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연판장에서 교수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정상급 저널에 3편을 내고 손에 꼽히는 수리물리 잡지에 논문을 발표한 연구실적을 낸 김 씨가 탈락한다면 국내의 수학자 중에서 부교수로 승진할 수 있는 수학자는 별로 많지 않으리라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의견”이라며 ‘연구 소홀’을 재임용 탈락 사유로 든 성균관대 측을 압박하였다.

또한 세계 양대 과학학술지 중 하나인 「사이언스」에서는 <올바른 답의 비싼 대가(代價)>(The High Cost of a Right Answer)라는 제목으로, 수학 분야 국제학술지인 「매서매티컬 인텔리전서」(Mathematical Intelligencer)에서는 <정직의 대가(代價)?>(The Rewards of Honesty?)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이 다뤄져 ‘한국 수학계에 자정능력이 없다’는 국제적 비판이 실리는 일도 있었으며, 첫 재판 당시 재판부로부터 전문가 의견을 요청받은 대한수학회와 고등과학원이 ‘의견을 낼 수 없다’고 회피하자 서지 랭 예일대 명예교수와 마이클 아티야 에든버러대 교수 등 세계 수학계의 거장들이 항의성 서한을 보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김 씨 재임용 탈락 당시 연판장에 서명했던 한 교수는 “부당한 해직을 당했는데도 침묵하는 학계 풍토와, 이를 구제해 주지 않는 사법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과 좌절로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싶다”며 김 씨에게 동정론을 폈다.

3.2.3. 판례의 시각[편집]

김 씨의 재임용 탈락이 단순히 본고사에 출제된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수학 문제로 인해 징계를 받은 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재임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해당 내용에 대해 판결하여 보기를 김 씨의 대학별입학고사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 원고에 대한 징계처분 및 부교수 승진 탈락이 사건 재임용거부결정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원고가 위와 같이 대학교원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품성과 자질을 지니고 있지 못한 이상 그러한 사정을 들어 이 사건 재임용거부결정이 부당하다 할 수 없다. 즉, 본고사 오류지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학의 교수임용 재량권을 확인해준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학 측의 평가기준인 교육자로서의 품위와 자질을 평가하는 방법이 옳으며, 이에 따라 김 씨의 임용여부를 결정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4]

다음은 판시에서 인정한 부분이다.
  • 원고는 외부연사 강연 후 다른 수학과 교수들에게 '원로교수들은 학생들이 포기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 학과교수회의석상에서 선배이자 원로인 교수에게 '당신 전공은 학과를 위해서 별로 필요가 없고 만일 대학원 학생을 위한다면 내가 당신 과목을 다 강의할 수 있으니 걱정말라'고 말하고, 이어 원래 있었던 전공과정을 없앨 수 없다는 원로교수에게 '말 같지도 않은 말 하지 말아요'라고 대응하였다.
  • 본인이 담당하던 위상수학 II 과목의 수강신청자가 최소수강인원인 10명에 미달되어 폐강의 위기를 맞게 되자, 수강신청만 해 놓으면 B 학점은 보장할 테니 많이 신청하고, 졸업시험에 출제할 것이니 많이 홍보하라는 말을 하였다. 실제로 수강생들 중 홍보를 담당하던 학생은 위 과목의 수업에 전혀 출석하지 아니하고도 최고점인 A+ 학점을 받았다.
  • 수업시간 중 학생들에게, 위 입학시험 문제출제 관계자를 지칭하여 '그런 씨X놈이 어디 있느냐'는 말과 '전철에서 노약자나 애기와 동행한 엄마에게 절대로 자리를 양보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 수업시간 중 시위로 인한 소리가 귀에 거슬리자 '저런 새X들이 학생이냐', '저런 놈들을 총으로 쏴 죽여 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고, 수업 중 공공연히 '내가 내년에 학과장이 되면 과내 모든 써클을 없애버리고, 학생회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
  • 수업 중 성균관대학교 출신 교수들을 대상으로 '그런 사람이 무슨 교수냐'는 말을 하고, 수업시간 중 '교생실습은 본인들이 공부가 하기 싫어서 나가는 것이니 나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수업 중 '애가 어렸을 때 잠자는데 울길래 패버렸다', '취직은 나와 상관없다. 어느 회사에 합격을 하더라도 내가 졸업 안 시키면 못하는 거다. 맘대로 해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는 오지말라'고 말하였고,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대학원생들은 쭉정이들이다'라고 말하였다.
  • 다른 교수의 추천서를 받으려는 학생에게 '다른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으려면 나에게는 받을 생각 하지 말고 나에게 추천서를 받으려면 저쪽을 받지마라'고 했다.
  • 학교 수학과 동아리에서 학생들에게 x발놈개X끼라는 욕설을 하였다.
  • 교수모임 자리에서 동료교수에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오면 무엇 하나, 취직도 못할텐데'라는 말을 하였고, 1994년도 학기 초에 신임교수로서 부임인사차 방문한 다른 교수에게 '성균관대학교 수학과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대학원 수업에도 문제가 있었다.
    • 1991년 부터 1995년 경까지 대학원생들에게 박사과정을 1명도 지도할 계획이 없다고 공언하고, 실제로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학생을 1명도 지도하지 않았다.
    • 배정된 석사과정 학생 중에서도 1명만을 지도하였으며, 우수한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보내는 행위를 하였다.
  • 1992년 학과장에게 '앞으로 학과교수회의에는 참석 않을 것과 학과의 작은 일에는 모두 열외시켜 달라'는 통보를 한 이래, 위 학교 전체교수회의를 비롯한 학과교수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김 씨가 학자로서는 유능한 인물일지 몰라도 교수라는 직함을 달기에는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보이므로, 수학 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 원인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으나 대학교수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성균관대학교의 재임용거부결정을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판결하여 보였다). 1991년에 임용된 이래 1995년까지 언행과 업무상에서 문제를 일으킨 부분이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임용권 행사는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문제를 일으킨 김 교수의 언행을 학교 측에서는 학과장으로 추천할 정도로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묵인해오다가 본고사 문제를 지적하자 그제서야 문제 삼아 재임용을 탈락시킨 성대의 행동을 치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5] 객관적으로 김 교수가 인격적인 면에서 교수의 자격에 크게 벗어났던 것은 사실이므로 법적인 잘못은 없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1월 25일 공개한 이정렬 판사의 발언에 따르면, 본래는 만장일치로 승소판결을 내려고 했으나 김 교수의 청구에서 "1996년 3월 1일자 재임용 거부를 무효로 한다"는 구절을 발견하고, 법정공휴일인 삼일절에 처분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심리를 재개하였다고 한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항소심에서 "삼일절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 공휴일이니까 쉬었거든! 그러니까 김 씨의 말은 거짓말이다!"라고 학교 측이 주장한다면 김 씨의 주장이 "사실관계 위반"으로 파기당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4. 사건 발생[편집]

2007년 1월 15일 오후 6시 30분, 패소 판결을 알게 된 김씨는 석궁과 석궁 화살, 회칼, 노끈을 가지고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박홍우 판사의 집을 찾아갔다. 판사는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씨는 석궁을 들이대며 판사를 습격하였다. 김 씨가 쏜 화살에 맞은 판사는 김씨와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김 씨는 판사의 몸 위에 타고 올라 죽여버린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판사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고 아파트 경비원과 박홍우 판사의 운전기사가 달려와서 다시 석궁을 장전하려 했던 김 씨를 제압했다.

박 판사는 경비원에게 신고하라고 하면서, 아파트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10분 쯤 뒤에 내려와서 119 구조대의 구급차를 타고 서울의료원 응급실로 후송되어 갔다. 붙잡혀 있던 김씨는 경찰에 넘겨졌다.

5. 사건에 대한 형사재판[편집]

5.1. 재판 과정[편집]

링크된 판결문과 녹취는 그대로 스캔되어 올라가 있거나 기자의 기록으로 남아 있으므로 그것만 보면 된다. 피고인 김명호 교수의 입장에서 쓰인 판결 기록

김 씨는 상해죄와 그 동안 1인 시위를 거치면서 여러 판사들에게 실명으로 퍼부은 욕설과 비난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었으며, 1심에서는 박찬종 전 의원과 이기욱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다. 김씨는 공판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물의를 일으켰다. 판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며 판사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으며, 개판같은 재판이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김씨를 옹호하는 방청객들은 여러 차례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워 퇴장 명령을 당했다. 결국 5번째 공판에서 김씨는 이기욱 변호사를 해임하는 기행을 벌였고, 나머지 두 차례 공판에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출석하지 않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항소심에서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법률원 경남사무소자인 박훈 변호사를 선임하여 재판을 진행했다.

5.1.1. 판결례의 요약[편집]

실제 판결은 서울동부지방법원 2007. 10. 15, 선고 2007고단203,2007고단373(병합) 판결(1심) 서울동부지방법원 2008. 3. 14. 선고 2007노1060 판결(2심)대법원 2008. 6. 12. 선고 2008도2621 판결(3심)을 찾아보면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전공자들이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간단하게 개요를 덧붙인다.

우선 이해해야 할 부분은 이 판결은 대법원에 대한 상고를 기각한 판결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 상고를 했지만 적절한 사유가 없어 기각되어 결국 형이 확정된 사건이다.[6] 여기서 여러 부분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형사재판에서 자유심증주의의 한계 및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심증형성의 정도에 있어 합리적 의심의 의미 부분이다.

5.2. 판결에 대한 논란[편집]

이 사건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피해자와 피고인 모두 인정한 팩트는 다음과 같다
  1. 피고인(김명호 전 교수)는 피해자(박홍우 판사)에 나쁜 감정을 가졌다. - 피고인의 증언
  2. 피고인은 피해자의 아파트 주위를 사전답사했다. - 피고인의 증언
  3. 피고인은 석궁을 구입한 후 발사 연습을 했다. - 피고인의 증언 및 상점에서 확인한 증거 등
  4. 사건 발생 당일, 석궁과 회칼 등을 소지하고 피해자의 거주지 근처에서 피해자를 기다린 후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둘이 뒤엉켜서 계단을 굴렀다. 이 때, 석궁이 발사되었다. - 피고인, 경비원, 경찰 등 여러 인물의 증인 / 사건 당일 수거된 석궁과 화살
  5. 피고인은 경비원 등에 의해 제압되는 과정에서 2차로 피해자를 목표로 석궁을 발사하려다가 제지당했다.
  6. 피해자는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 피고인과 경비원의 증언 (피해자가 앰뷸런스를 탈 때 피를 흘리는걸 봤다고 피고인의 증언과 격투 직후 피해자가 피를 흘리는것 봤다는 경비원의 증언) / 병원 응급실에서 발급받은 진단서
  7. 이 사건은 폭행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피고인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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